K 리그 1(정확한 표기는 다 붙여서 'K리그1'으로 쓰는 게 맞을 겁니다, 아마. -_ㅡ;;;) 23 라운드, 포항과 전북의 경기를 보고 왔다. 나는 하루 전인 14일에 포항에 도착했고 선배는 경기하는 날(원래 당일이라 썼었는데 이게 표준어가 아닌 것 같더라)인 15일에 포항에 도착. 이 날 14시부터 비가 예보되어 있었는데 영화 보고 나오니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숙소 체크인이 18시부터인데 양해를 구해서 조금 일찍 들어갔고 잠시 쉬다가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별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여기어때 포항 중앙점, 역대급 숙소다. 일본에서의 숙소 포함해서 최고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일단 다른 지역에서도 여기어때 있으면 묵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와서 경기 보러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 공단 쪽으로 돌아가면 거의 막힘이 없는데 형산강 다리 건너 포스코 앞을 지나가는 길로 가니 말도 못 하게 막힌다. 4,000원이면 충분할 거리인데 막히는 바람에 한~ 참을 더 내야 했다. 아오, 아까워.
북문 앞의 표 파는 곳에 가니 젊은 총각이 발권기가 고장 나서 매표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남문으로 가서 표를 사야 한다고 안내한다. 기계 고장 난 게 본인 잘못이 아닐 텐데 굉장히 미안해하더라. 남문까지 걸어가서 표를 산 뒤 다시 북문으로 왔다.
이 날은 서포터 쪽에서 보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하프 라인 부근으로 향했다. 비를 피해 지붕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관중들. ㅋㅋㅋ 생각보다 훨씬 많이 왔다(4,395명).
포항 선발은 강현무, 우찬양, 김광석, 배슬기, 강상우, 김승대, 채프만, 이석현, 김지민, 이근호, 송승민. 진형은 4-3-3이다. 미드필더 라인은 세 명이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니라 채프만이 약간 내려선 형태. 최근 벤치에 앉는 일이 잦았던 배슬기의 선발이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었는데 대인 마크가 좋아서 이동국을 전담 마크하라고 내보낸 게 아닌가 싶다.
전북 선발은 황병근, 최철순, 최보경, 홍정호, 이용, 신형민, 로페즈, 정혁, 임선영, 티아고, 이동국. 진형은 4-1-4-1이다. 양쪽 윙으로 뛰는 로페즈, 티아고 모두 빠른 선수들이라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데 윙백인 최철순, 이용 두 선수 모두 오버 래핑이 활발하니 사실상 측면에서 네 명이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이는 신형민이라는 수준 높은 수비형 미드필더가 있어서 가능한 진형. 포항에 유난히 강했던 이동국은 당연하다는 듯 선발 출장.
선수들 몸 풀 때 라면과 김밥으로 요기를 하고, 일찌감치 맥주 홀짝거리는 사이 경기가 시작됐다.
전반 3분 30초 무렵 이용이 때린 슛이 골대를 살짝 빗나갔다. 약간 각이 없긴 했는데 거의 골키퍼와 1:1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수요일 경기지만 광복절이라 휴일. 하지만 다음 날은 평일이다. 경기 끝나면 21시인데, 전주까지 세 시간 걸린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정이 돼서야 도착이다. 그런 이유로 서포터들 얼마 안 올 줄 알았는데 성적이 워낙 좋아서 응원할 맛이 나는 건지, 전북 서포터들이 진짜 많이 왔다. 포항 홈인지 전북 홈인지 헷갈릴 정도로 열심히 응원해대더라.
전반 17분 무렵에는 이동국이 페널티 박스 밖에서 왼발로 슛을 때렸다. 강현무가 넘어지며 쳐냈다. 슛도 대단했고 막는 것도 대단했고. 공격은 거의 전북이 주도했지만 그래도 박빙이다 싶을 정도로 포항이 밀린다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포항이 먼저 골을 넣었다. 전반 33분에 이근호가 우당탕 밀고 들어가 가까스로 때린 슛을 황병근이 쳐냈다. 그걸 뒤에서 달려들던 이석현이 잡은 뒤 페널티 박스 밖에서 때렸는데 골이 됐다. 수비에 가려서 제대로 안 보였는지 몸 날리는 게 늦었다.
그리고 전반 38분, 추가 골이 터졌다. 이근호가 툭툭 치고 들어가다가 수비에 막혀 측면에서 중앙으로 볼을 몰고 왔는데 앞에 공간이 열리니까 그대로 슛을 날렸다. 30m 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 체중이 제대로 실리면서 공이 그대로 날아가 골대 모서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이건 어느 골키퍼가 와도 못 막을 슛. 예전 백승철의 캐논 슛이 생각날 정도로 제대로 된 중거리 슛이었다. 올 시즌 중거리 슛은 강상우가 넣은 두 골 정도 말고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이근호의 이 골은 포항 역사에 남을 골이 아닐까 싶다. 진짜 멋지게 들어갔다.
8, 9, 10, 11, 12 라운드에서 포항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내리막을 탔었는데 13 라운드에서 전북을 만나 0 : 3 으로 이겨버리면서 수많은 토토쟁이들을 엿먹였다. 그런데 3개월 후 치러진 경기에서도 전반에 내리 두 골을 넣고 앞서가니 올 시즌 전북은 포항에는 안 되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프 타임에 자리를 옮겼다. 더워서 이미 땀에 절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 좀 맞으면 어떠냐 하는 심정이었고 같이 간 선배도 비 맞아도 괜찮다고 해서. 원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앞으로 가 비 맞으면서 볼 생각이었는데 선배가 쪽 팔리니 서포터 쪽으로 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그쪽으로 갔는데... 중딩으로 추정되는 한 무리가 정신없이 악을 써대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데, 치어리더들이 그쪽에서 서포터들과 같이 응원하더라. 아마도 치어리더 처자들 앞에서 까불고 싶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유야 어쨌든 목 터져라 소리 지르며 응원하더라.
후반 시작과 동시에 김신욱과 한교원이 투입되었고 1분 만에 저 두 선수가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지만 강현무의 선방에 막혔다. 잠시 후 후반 4분, 뒤에서 길게 넘어온 크로스를 이동국이 머리로 떨어뜨렸고 한교원이 강현무 가랑이 사이로 넘어지며 밀어 넣어 전북의 첫 골이 터졌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썼는데 이동국이 걸리지 않았다. 헤더 패스가 기똥찼다.
기세가 오른 전북이 계속 몰아붙였다. 1분 뒤인 후반 5분에는 이동국이 발리 슛을 날렸는데 강현무가 잘 쳐냈다. 괜히 발리 장인(匠人)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싶더라.
그렇게 포항이 밀리던 분위기 속에서 이석현이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공을 잡았다. 오른발로 중거리 슛을 날렸는데 신형민 몸에 맞으면서 살짝 굴절되어 그대로 골. 이렇게 되면 이석현은 두 골. 자, 이렇게 된 김에 해트트릭 노려보자! 하고 악을 썼다.
후반 11분에는 한교원의 크로스를 김신욱이 헤더 슛, 골대 맞고 튀어나왔다.
후반 28분. 하프 라인 근처에서 이석현이 공을 잡아 앞으로 치고 들어가면서 전북 수비를 완전히 무너뜨리더니 기어코 해트트릭을 해버렸다. 마지막에 상대 수비 바보로 만든 볼 터치는 진짜... 인천에서의 전성기 모습 그대로였다. 공은 오른쪽으로 치고 자신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기똥찬 드리블에 이은 골이었다. 서포터들 앞으로 가 자신의 등 번호를 가리키는 셀러브레이션으로 마무리. 스코어는 4 : 1이 되었다. 망연자실한 전북 서포터들은 이미 입 다물.
후반 36분에 이동국이 뒤에서 길게 넘겨준 공을 김신욱이 머리로 가볍게 돌려놓으면서 득점. 냉큼 공 주워 하프 라인으로 달려가기 바쁠 텐데 김신욱은 그 와중에도 무릎 꿇고 앉아 하늘 향해 양손 검지 치켜드는 셀러브레이션을 잊지 않았다. 풉~
경기 종료 3분을 남겨두고 포항이 역습. 김승대가 이상기한테 패스하기에 에라이, 끝났네~ 싶었는데... 이상기가 그 공을 수비 사이 공간으로 절묘하게 돌려줬다. 김승대가 침착하게 마무리해서 또 한 골. 5 : 2가 되었다. 추가 시간 4분 동안 골이 없어서 그대로 경기는 마무리.
최근 전북이 잇달아 지긴 했지만 그래도 워낙 강한 팀인 데다 비까지 와서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팀 역사에 남을 스코어로 발라버렸다. 2009년 9월 13일에 남패한테 여덟 골 몰아넣고 한 골 먹은 경기와 맞먹을 정도의 경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니... 엄청난 행운이다.
상대에게 선제골을 줄 수 있다 쳐도, 또다시 실점하며 전반에 2 : 0 으로 끌려갔으니, 최강희 감독 입장에서는 공격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라인을 잔뜩 끌어올렸는데 포항이 그 뒤를 제대로 공략한 거고. 사실 이 날 축구도 포항다운 패스 축구는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상대와 경합하는 우당탕 장면에서 공이 죄다 포항 선수 발 앞에 떨어졌고 이런저런 행운이 겹치며 뜻밖의 대승!
리그 압도적 1강에게 거둔 대승인지라 분위기 살려 계속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최순호 감독이 나가고 황선홍 감독이 돌아오는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지만, 이런 경기가 계속된다면 최순호 감독 나가라 소리는 입 밖에도 못 낼 것 같다.
이석현이 해트트릭하면서 최고의 선수가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근호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정말 열심히 뛰면서 대부분의 공격 상황에 이바지했다. 나갈 공인데 기를 쓰고 쫓아가 살려내기도 하더니 이 날 경기에서는 상대에게 뺏긴 공을 악착같이 되찾아오는 모습도 여러 번 보여줬다. 젊은 선수가 팬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가 교체로 들어와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닌다고 깐 게 엊그제 같은데, 전북과의 경기 뛰는 걸 보니 그러다 죽겠다고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이 뛰었다. 박수를 보낸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이석현 선수도 당연히 칭찬해야 한다. 정원진과 맞트레이드 된 병역 미필 선수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욕먹었지만 이 날 경기로 충분히 포항 팬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선수임을 입증했다. 인천에서 뛸 때 참 잘한다 싶었는데 북패 가서 영 활약이 없더라니, 포항 와서 입대 전까지라도 부지런히 잘 뛰어줬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본인이 득점하는 것도 좋지만 김승대 선수에게 킬 패스 찔러주는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두 선수만 더 언급하고 마무리해야겠다. 일단 김지민. 구단 관계자가 '개처럼 뛴다'라는 표현까지 썼던데 과하지 않다고 본다. 진~ 짜 열심히 뛴다. 어제도 비가 엄청나게 오는 와중에도 굉장히 많이 뛰더라. 다만... 딱 한 발이 아쉬웠다. 진짜, 딱 한 발이다. 한 발만 더 들어가면 되는데 그 한 발이 늦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뛰는 선수니까 조만간 터지지 않을까 싶다. 심동운이 돌아와서 번갈아 가며 스피드로 상대 휘저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근두근한다. 다른 한 선수는 강현무. 멘탈이 터질 만도 한데 잘 버텨주고 있다. 신화용이 그리운 건 사실이지만 신화용의 이적으로 강현무라는 훌륭한 선수가 나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 날도 강현무 선수가 막아낸 게 한, 둘이 아니다. 월드컵 때의 조현우가 부럽지 않다.
점유율은 49 : 51 로 비슷했지만, 슈팅의 영양가 면에서 포항이 압도적이었다. 열 개의 슈팅을 날려 아홉 개가 골대 안으로 향했는데 그 중 다섯 개가 골. 이렇게 순도 높은 경기가 또 있을까 싶다. 지금의 포항 축구를 보면 몇 년 전의 전성기 시절이 그립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우리가 했던 패스 축구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백패스 1위, 쓰잘데기 없는 패스 1위의 팀이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경기는 팀 역사에 남기고도 남는다. 최순호 감독은 잔뜩 웅크렸다가 롱 패스 날려대는 게 공격 축구라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영 맘에 들지 않았는데 이 날처럼 수비 위주로 가다가 카운터 어택 날려대는 족족 먹힌다면, 나쁘지는 않겠다 싶긴 했다.
아무튼... 비 오는 와중에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 응원한 팬들, 다들 대단했다. 포항 서포터들의 '매수렐레'가 압권 아니었나 싶고... 멀리까지 와서 고생한 전북 팬들은 아쉽게 됐네. 뭐, 그래도 우승할 거잖아. -ㅅ-
당연히 질 것이라 생각한 경기에서 영일만 친구 불렀더니 개뿌듯.
경기 마치고 버스 타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버스나 제대로 타겠나 싶었는데 102번, 100번이 잇달아 왔고... 102번이 어그로 끄는 사이 100번에 올라타는 바람에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죽도 시장 가서 바레인 전 보면서 게 뜯어먹으려고 했는데... 자리 잡고 앉으니 이미 3 : 0 이다. 전반에만 5 : 0 되는 거 보고 게 뜯어먹는 데 집중했다. 우리 뒤쪽에 전북 응원하러 온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이 와서 밥 먹고 가던데... 무사히 귀가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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