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 뉴스에서 '22일에 J 리그 개막' 한다는 내용을 봤다. 응? 22일에 개막한다고? 의외였다. 일본은 학교의 신학기도 4월, 회사의 신입 사원 입사도 4월, 모든 시작이 4월이라 당연히 그 때 개막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일본은 우리보다 따뜻한 나라. 한국에 폭설 주의보 내렸다는 뉴스 본 날 오사카는 비가 내렸었지. 우리보다 따뜻하니 시즌 개막도 빠를 수밖에.
22일은 금요일이기에 '뭔 개막을 금요일에 하냐?' 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개막전 경기만 금요일 저녁이고 나머지 경기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있다. 그래서 22일 개막전이 어디와 어디의 경기인가 봤더니... 봤더니... 봤더니... '세레소 오사카 vs 빗셀 고베' 의 경기였다. 헐?
이니에스타와 포돌스키를 영입했다고 할 때부터 고베 경기는 한 번 보고 싶었다. 오사카에서 그닥 멀지도 않고. 하지만 번번히 표를 구입하지 못했다. 항상 매진이었거든. 그런데 세레소 오사카의 홈 경기장에서 고베랑 붙는다니,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월요일에 표를 예매하려고 했더니 홈/원정 서포터 자유석만 남겨두고 전부 매진이다. '개막 버프 + 이니에스타 & 비야 & 포돌스키 버프' 가 더해져 이런 일이 생겼다.
홈 서포터 자유석을 예매하고 금요일만 기다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경기장으로 출발!
집에서 경기장까지는 4㎞가 채 안 된다. 120円이면 전철로 근처까지 갈 수 있지만 운동도 할 겸 걸어가기로 한다.
전철 다니는 길 따라 계속 걸어가면 경기장까지 금방이다. 가는 길에 내 인생 술집도 나온다. 이 길, 3개월만에 걷는다. ㅋ
제법 부티가 나는 동네다. 로또 맞아서 이런 한적한 동네에 집 사서 빈둥거리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날마다 한다. ㅠ_ㅠ
이 쭉 뻗은 길의 끝에 나가이 얀마 스타디움이 있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이었는데 이 길은 아직 한적한 편이었다.
경기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인데.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인파. 일단 올 시즌 세레소(세레소 오사카라고 다 쓰기 귀찮으니 줄여서 오사카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감바 오사카와 헷갈릴 수 있다. 그래서 그냥 세레소로 쓴다.) 유니폼을 사고 싶어서 천막을 찾아 헤맸다. 유니폼 파는 곳을 찾긴 했는데, 마킹 없는 유니폼만 팔고 있더라. 머플러는 촌스러워서 못 사겠고. '홈페이지에서 사자' 고 마음 먹고 아무 것도 사지 않은 채 돌아나왔다.
홈 서포터 입장하는 곳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몰려 바글바글. 한 발, 한 발, 찔끔찔끔 걸어 들어가 QR 코드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주기에 봤더니 오늘 경기와 관련된 찌라시. 그리고... 옷을 준다! 응? 이게 뭐야?
나중에 자리 잡고 나서 봤더니, 야구 유니폼 스타일의 옷이었다. 돈 주고 사더라도 최소 3,000円은 줘야 할 거 같은데... 이러면 입장료 뽕 뽑은 거잖아? ㅋㅋㅋ
아직은 듬성 듬성 빈 자리가 많이 보이는 나가이 얀마 스타디움
오사카에서 고베까지는 한 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간사이 팀끼리 개막전에 붙여놓은 것도 대단하다 싶더라.
뭔가 밝게 빛나고 있기에 봤더니 마라톤 어쩌고라 쓰여 있더라. 마라톤 골인 지점인 모양이다.
잔디 관리 기똥차게 해놨다. 저런 잔디에서 공 차면 얼마나 재미있을꼬.
이건 뭐야? 최은성 골키퍼인 줄 알았네. -_ㅡ;;;
항상 같은 자리에 걸려 있는 두 장의 플랑 카드.
뭔가 굉장히 낡아 보이던 깃발? 천?
빈 자리가 없어서 자유석 맨~ 꼭대기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 측에서 자리 맡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사전에도 영상 등을 통해 이런 식으로 자리 잡지 말라고 계도하고, 경기가 있는 날도 직원이 피켓 들고 다니면서 자리 맡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되겠냐고.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에 입장했는데도 앞 쪽은 빈 자리가 전혀 없었다. 모든 자리에 물건이 놓여 있고, 종이 쪼가리 같은 걸 테이프로 고정해서 자리를 맡아놨다는 표시를 했더라. 가끔 안 쪽에 빈 자리가 듬성듬성 보이긴 하는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도 불편하고, 일본어로 저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말하는 것도 뭔가 불편해서 포기했다. 그렇게 계단 쪽에 자리 있는 곳을 찾아 가다보니 결국 경기장 맨 꼭대기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원정 팀인 고베의 서포터들이 걸어놓은 플랑카드.
감바와의 경기에서 더욱 빛날 'REAL OSAKA' 플랑 카드.
오사카의 플랑 카드가 걸려 있는 쪽도 서포터 자리이긴 한데, 저 쪽은 그닥 열성적인 응원을 하지 않는, 가족 단위의 팬들이 많은 곳이다.
고베 팬들은 대형 스페인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ㅋ
볼 때마다 놀라운 김진현 응원 깃발. 엄청 커다란 저 깃발을, 여자 분이 쉴 새 없이 흔든다. 대단한 열정이다, 진짜.
이 쪽이 세레소 오사카 서포터들 중에서도 가장 핫했던 구역. 응원 시작하면 난리가 난다.
수백 만원 짜리 장비를 들고, 끌고, 골대 뒤에 자리 잡는 카메라 맨들.
경기 전에 노트북과 스마트 폰을 동원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쁘다.
살수기 등장. 나가이 얀마 스타디움에는 스프링 쿨러 같은 살수 시설이 없어서 이렇게 이동식 장비를 이용해 물을 뿌린다.
경기 시작 전 뭔 이벤트를 했다. 100만円 준다고 되어 있더라.
귀여운 처자가 알다리를 내놓고 있기에 최대 줌으로 당겨 찍어봤다.
뭔 이벤트인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슛을 하더라. 패널티 킥 차는 곳보다 뒤 쪽, 그러니까 패널티 박스 경계 라인에 놓고 찼으니까 16.5m 거리에서 찬 건데 텅 빈 골대에 차는 건데도 그물을 흔든 사람은 몇 안 됐다. 위로 넘어가고 옆으로 굴러가고. 희한한 건 골대 위 그물에 공 올린 사람이 둘이나 나왔다는 것.
고베 유니폼 입은 팬이 등장하자 오사카 서포터 쪽에서 우~ 하고 야유가 나왔는데, 슛에 실패하니까 박수 쳐주더라. ㅋㅋㅋ
오늘도 등장한 세레소 오사카의 마스코트 로비 여사님.
아줌마스럽게 춤도 한 번 춰주시고. ㅋㅋㅋ
세레소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주전 골키퍼 김진현 선수.
경기 내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카메라. 이 카메라가 정말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저 카메라가 정말 부러웠다. 저 카메라로 찍은 화면이 전광판에 몇 차례 나왔는데 슛 하는 선수 바로 뒤에서 찍은 듯 보여서 정말 멋있었다. 우리도 저런 카메라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사실, 역동적인 화면을 싸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드론을 이용하는 거다.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영상을 찍을 수 있다. 문제는, 드론은 여러가지 이유로 필드에 추락할 수 있다는 거다. 만약 경기 중인 선수 머리로 떨어진다면?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지는 거다. 그래서 위 사진의 카메라도 와이어를 여러 개 연결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거고. 저 카메라, 엄청 비쌀 거라 생각한다.
응원하는 거 보면... 진짜 J 리그에서 공 찰 맛 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지간해서는 경기에 나설 수 없는 후보 골키퍼지만 팬들에게 인사하고, 박수 쳐주고.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입장하는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행사는 K 리그에서도 자주 한다.
고베의 주전 골키퍼 김승규 선수. J 리그에서 인정 받는 골키퍼는 죄다 한국 선수들이다.
빡쌔게 훈련 시키더만.
드디어 등장한 고베의 필드 플레이어들.
오사카의 필드 플레이어들도 마스코트와 하이 파이브 하면서 뛰어 들어온다.
팬들에게 인사부터 하고,
이후 몸을 푸는 선수들. 그리고...
안드레 이니에스타와 다비드 비야. 저 두 선수를 직접 보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ㄷㄷㄷ
아... 다시 봐도 말이 안 되는 그림. 이걸 현실로 만들어버린 고베가 대단하다.
어느 틈에 바글바글 들어찬 고베의 원정 서포터 석.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팬들이 엄청나게 몰려 왔다.
고베의 스타팅 멤버. 이니에스타, 비야, 포돌스키가 모두 선발로 나온다. ㄷㄷㄷ
위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다. 열정이 없다면, 본인이 즐겁지 않다면, 절대 저렇게 할 수 없을 거다.
폭죽 쏠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맨 꼭대기라 지붕에 가려져 제대로 못 봤다. ㅠ_ㅠ
나도 모르게 자꾸 이니에스타와 비야에게 렌즈를 향하게 된다. 600㎜ 줌이라 이나마라도 건진 거지, 보통 카메라였음 점으로 나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경기 전에 포돌스키가 꽃다발을 받았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김승규와 뭔가 얘기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ㅋ
포돌스키도 직접 보고,
이니에스타도 직접 보고,
비야까지 직접 본다. ㄷㄷㄷ
상대팀 마스코트지만 기분 좋게 인사하고 지나가는 다비드 비야.
세레소 오사카는 소우자 선수 때문인지 대형 브라질 깃발이 응원에 참가한다.
빗셀 고베 골키퍼 유니폼은 왜 저 따위냐. -_ㅡ;;;
어느덧 꽉 들어차버린 경기장. 이 날 공식 입장 관중은 42,221명으로 집계 됐다. 5만 명 규모의 경기장을 거의 꽉 채웠다.
경기 전 스크럼을 짜며 승리를 다짐하는 고베의 선수들.
하... 진짜... 다시 봐도 안 믿긴다.
많은 사람들이 이니에스타와 비야가 있는데도 고베 경기가 형편 없다며 깐다. 직접 보고 까는 건가 궁금하더라. 한 물 갔다며 엄청 씹어대던데, 나이가 있으니 당연히 전성기 때의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니에스타가 공 잡는 것 만으로 긴장감이 엄청나게 커진다. 이니에스타 앞에는 항상 세레소 오사카의 수비 선수 두 명이 자리했는데, 고양이 앞에 놓인 생쥐마냥 잔뜩 쫄아 있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쫄아 있으면서도 수비를 잘 해냈다.
전반 초반에는 이니에스타가 가운데에서 공을 잡으면 계속 세레소 오른쪽 측면에 있던 비야에게 공을 보내주더라. 비야가 그걸 툭툭 치면서 가운데로 끌고 들어오는데, 세레소 선수들이 박스 밖으로 잘 밀어냈다. 패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야 기습적인 슛을 날리던, 킬 패스를 하던, 뭔가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낼텐데 박스 밖으로 밀어내버리니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세레소의 센터 백 두 명은 공격 상황에서도 절대로 하프 라인을 넘지 않았고, 수비 전환 시에는 공격에 가담했던 선수들이 엄청 빠르게 내려왔다. 이 날 세레소의 포메이션은 4-4-2였는데 수비하는 순간 4-5-1이 되면서 전부 하프 라인 밑으로 내려오더라. 거기에다 전방 압박이 좋아서 고베가 좀처럼 힘을 못 썼다.
세레소와 고베 모두 중앙을 엄청 두껍게 막아 섰는데 양 팀 모두 측면 활용을 거의 안 하더라. 주구장창 가운데만 파고 있었다. 수비가 많은데 꾸역꾸역 가운데 파니 뭔가 결정적인 장면은 안 나오지. 경기가 좀 루즈해졌다. 하지만 두 팀 모두 패스 워크가 좋았다. 확실히 원 터치 패스나 2 : 1 패스가 자주 나왔다. 패스 수준이 높았다.
양 팀 선수가 충돌하면서 다소 격한 장면이 나왔다. 패싸움하나 싶을 정도로.
세레소 선수들이 왜 반칙이냐고 막 항의하고 할 만 하다. 왜냐하면...
패널티 박스 바로 바깥에서의 프리킥인데다, 공 앞에 서 있는 선수가... 7번 다비드 비야, 8번 안드레 이니에스타. ㄷㄷㄷ
전 세계 어느 나라 수비가 안 쫄겠냐. 둘 다 오프 더 볼 환경에서 엄청난 장면을 숫하게 만든 선수인데.
하지만 비야의 킥은 수비 벽에 맞고 튕겨 나갔다.
전반이 끝나고 하프 타임이 되었다. 아이돌로 보이는 처자들이 떼로 나와 노래하면서 춤 추던데, 나는 하필 군생활 같이 했던 녀석에게 전화오는 바람에 공연을 제대로 못 봤다. 후반전 시작.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맥주 마셨다가는 그대로 얼어 붙을 것 같더라. 혹시 몰라 무릎 담요 가지고 갔는데, 정말 잘한 짓이었다. 전반전 시작하자마자 찬 바람이 조금씩 느껴지더라니 후반에는 냉장고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후반전에도 딱히 그럴싸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레소의 선제 골이 터졌다. 코너에서 올라온 공을 김승규가 제대로 쳐내지 못했고 이걸 야마시타 선수가 헤더로 골을 만들어냈다.
고베가 만회 골을 노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위협적인 장면은 세레소 쪽에서 더 많이 나왔다. 골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슛이 두 번이나 나왔다.
고베에서 5번 달고 뛰는 야마구치 선수가 공만 잡았다 하면 세레소 서포터들이 엄청나게 야유해댔다. 야마구치 선수는 지난 해까지 세레소 오사카에서 뛰던 선수. 윤정환 감독이 그만두어 자기도 이적한다는 인터뷰를 해서 화제가 된 선수였다. 이 선수가 공만 잡았다 하면 세레소 서포터들이 우~ 하고 야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술집이 23시까지만 영업하는데 22시가 마지막 주문 받는 시간인지라, 마음이 급했다.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면 한참 걸린텐데... 그래서 경기 종료 4분을 남기고 먼저 나왔다. 술집까지 가면서 스마트 폰으로 경기 상황 계속 체크하고.
추가 골 터지지 않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기록만 보면 고베가 압도적인 경기를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패스 횟수 역시 1.5배 이상이지만 패스로 눌러버린 경기도 아니었다. 고베의 패스가 훌륭하긴 했지만 세레소가 밀린 경기도 아니었다.
기분 좋게 일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다.
굴다리 밑으로 저 멀리 보이는 아베노 하루카스.
모처럼 수준 높은 패스가 많이 나온 경기를 봤다. 이니에스타, 비야, 포돌스키 있어도 별 거 아니라며 엄청 까대고 빈정대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월드컵에서 독일을 2 : 0 으로 발라버린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자주 나오지는 않았지만 비야의 개인 드리블에 의한 돌파 같은 장면도 두 번 정도 있었고... 저런 수준 높은 선수들을 불러 와 리그에서 뛰게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K 리그의 수준도 지금보다 더 높아져서 좋은 선수들 많이 왔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선수 팔아먹는 셀러 역할 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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