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서 그~ 렇~ 게 졸업 이후의 계획을 물어봤더랬다. 공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졸업 후에는 진학을 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것인지. 학기가 끝날 무렵 물어보고, 방학 전에 종이를 나눠주며 쓰라 하고. 처음에는 외국인이니까 몰래 잠수 타고 불법 체류자가 될 것을 걱정하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특정 학교에 보내거나 하면 뭔가 받는 게 있지 않을까 싶더라. 뭐, 자세한 건 모르니까.
나는 입학 때부터 줄곧 졸업 후 귀국이라고 얘기했다. 회사를 그만둔 게 아니니까 졸업 후 복직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한국에서 회사에 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하는 친구는 거의 없었지만 회사 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 때마다 나는 최악이라고 대답했다. 일본어가 짧아서 뭐가 어떻게 안 좋은지 말하는 건 어렵지만, 동료들 중 멍청이들이 많다고, 월급 도둑놈들이 많다고 했다.
복직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40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다가, 가장 암울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10년 넘게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입사한 지 13년, 전에 했던 것을 포함하면 17년의 경력자지만 갓 입사한 신입 사원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업무를 배운 지 얼추 두 달. 생소하기만 했던 것들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라는 것.
일단 근무 시스템이 훌륭하다. 2007년에 입사해서 처음 2년인가를 제외하고는 쭈~ 욱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근무를 했다. 교대 근무를 하기도 했고, 날마다 출근과 퇴근 시간이 달라지는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항상 같은 시간에 가서 같은 시간에 오게 되니까 행복하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 게다가 점심 시간과 운동 시간이 한 시간씩 보장이 되니까 회사에 머무는 아홉 시간 중 일곱 시간이 일하는 시간인 거다. 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도 자유로워서 일이 도저히 안 된다거나 힘들다 싶으면 수시로 쉬어도 된다.
업무 내용도 좋다. 예전에 하던 일은 실시간으로 처리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하다. 물론 내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더해야 하니까 한 사람 몫을 온전히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니까.
사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이나 업무 내용 같은 건 적응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전에 있던 곳은 그야말로 7H AH 77I 집합소. 경력 길고 나이 많은 것들은 전형적인 꼰대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 가 수두룩~ 했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는 것도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권한이나 되는 걸 베풀어서 누릴 수 있도록 한다고 생각하더라. 밑에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 기본도 못하고 그로 인해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러면서 본인이 챙길 것들은 다 챙기려 든다. 나 같으면 미안한 마음에 하다 못해 청소라도 더 하고 잡다한 일이라도 도맡으려 하겠는데 그런 것도 없다. 개뿔도 모르면서 월급 받아먹기 급급한 거다. 그야말로 월급 도둑놈. 그런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물론 아직 얼마 안 되서 사람들 파악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달 정도 생활해보니 일단 사무실 내의 최상위 포식자(?)는 꼰대 포스가 1도 없는 분. 권위 의식 같은 것도 없고 불필요한 허례허식 같은 것도 싫어하시는 듯 하다. 말은 다소 거칠지만 상대가 마음 다칠까봐 걱정하는, 전형적인 츤데레 캐릭터. 거기에 팀장도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다. 上에게 깨지고 오면 中은 下들 모아놓고 깨기 마련인데, 팀장은 그런 게 없다. 뭔가 싫은 소리를 들어도 딱 자기까지 듣는 걸로 끝. 그걸 굳이 아랫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는다. 이게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볼수록 참 좋은 사람이고나 싶다. 나도 나이 먹고, 짬 차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다들 뭔가 자기만의 특기가 있다. 프로그램을 잘 짜서 동료들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도 있고, 어려운 일을 쉽게 풀어서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다들 확실한 특기가 있다보니 경력이나 나이를 앞세워 무시한다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저 저가 제일 잘 났다며 개뿔도 없는 것들이 건방만 떠는 전 파트의 것들과는 다르다.
시스템도 괜찮고, 사람들도 좋고, 그러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지금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는 내 미숙한 실력 말고는 없는 거다. 하루 빨리 근무에 능숙해지고 나만의 특기 같은 게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걸 빨리 해내라고 쥐어짜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러니 실수가 줄고.
나불나불 말이 길었는데,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다는 거다. 굉장히 암울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정말 좋다.
게다가 숙소도, 룸 메이트도 무척이나 훌륭하다. 밖에 방을 얻었다면 월세에, 가스/수도/전기 요금에, 월 50만원 이상은 꼬박꼬박 깨질텐데 1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충분한 거다. 그런 이유로 바로 돈이 좀 모일 줄 알았지만... 필요한 것들, 사실은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에 버리고 온 것들을 다시 지르고, 월급 많이 들어온다고 부자가 된 기분에 마구 질러대고 이러다보니 두 달 월급 받아서 고스란히 다 까먹었다. 다음 달부터는 좀 덜 쓰고 더 모아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차만 딱 나와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소소하게 차박 캠핑이나 다니면서 쉬고 그러면. 거기에 코로나 문제가 해결되어 일본에 다녀올 수 있게 되면 더 좋겠고.
일본에 보낸 EMS 다섯 개. 가장 걱정했던 건 주소가 이상했던 S쨩이었는데 잘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니 병원과 모토조노 선생님에게도 잘 갔을 거라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이것저것 보내주고 싶다.
남들은 집 장만하고 애 키우느라 바쁘다는데, 일본 다녀와서 저축한 거 다 까먹고 빚만 생겼다. 게다가 차도 죄다 은행 빚으로 살 생각인지라 10년 정도는 빚 갚으며 살아야 할 팔자가 됐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보낸 시간은 무척이나 행복했고 지금도 그리울 정도로 좋은 기억이니까. 그리고 빚 갚는 것도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연체하는 일 없이 꼬박꼬박 잘 갚으면 되는 거니까, 뭐.
한 군데에서 20년 가까이 버티고 있던 ㅺ도 있는데, 이제와서 5년 지나면 칼 같이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한단다. '진작에 저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왜 이제서야...' 하는 마음도 있고, 지금 있는 곳이 무척 맘에 드니까 '여기에서 오래 버티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데, 앞으로 일이니까 뭐.
당장은 다른 사람들한테 폐 끼치지 않고 온전히 한 사람 몫 하면서 월급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게 목표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나 일본어 쪽으로도 욕심을 좀 더 내야지.
요즘 일기를 몰아서 읽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오늘 일기는 재미 없겠고만. 누굴 까고 그래야 재미있을텐데. ㅋㅋㅋ
벌써 아홉 시 반이다. 대충 씻고 영릉에 다녀올까 한다. 코로나가 다시 확산세라 돌아다니지 않아야 하는데 밀폐된 공간이 아니니까, 바람 쐴 겸 해서. 다녀오면서 아울렛에 들러 회사에 신고 다닐 운동화 있나 한 번 둘러봐야 되겠고. 오후에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잠시 책 좀 볼까 싶다. 내일은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야 하고.
다음 주가 지나면 동료들 앞에서 브리핑도 해야 하고, 상황 근무도 있고. 상황 근무가 끝나면 휴가 받아서 포항에 다녀와야 한다. 6월도 바쁘게 지나갈 것 같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외삼촌한테 전화가 왔던데 뭔 일인지 모르겠다. 일단 일시 정지 중이라는 메시지가 가지 않았으니 귀국한 건 알고 있을테지. 어쩌면 의료보험료 때문에 귀국 & 복직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의료보험료를 내고 싶지 않다고 보험 공단에 민원을 넣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역시, 전화로 해결해야 한다. 가족이 힘이 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확실히 짐이다. 굳이 마음에 상처 받아가며 가족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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