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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타 』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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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ㄷ빌라로 이사 가고 나서였으니까, 아버지께서 이혼하고 새 엄마 만나러 다니느라 바쁠 때였던지라 나 홀로 지내는(이라고 하지만 동생이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시간이 많았던 때였으니까,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의 나는 공부를 꽤 잘 했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시험 때마다 전 과목 100점이냐, 하나를 틀렸냐가 갈릴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아버지께서는 성적에 따른 보상이 확실한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꽤 엄청나다 싶을 정도로 보상의 정도가 컸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문방구(에서 장난감을 팔았더랬다)에 가서 얼굴 들이민 뒤 외상 긁으면 끝이었다. 금액에 제한이 없으니 맘에 드는 걸 가지고 와서 반품할 수 없도록 냅다 뜯어버리는 게 공식이었다. 3만 원이 넘는 커다란 장난감을 들고 오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곤혹스러워 하며 문방구에 확인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뿌듯해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매 번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난감보다 만화책의 유혹이 컸던 때가 있었다.

요즘도 주는지 모르겠는데, 한 때 군대나 학교를 대상으로 마구 뿌려댔던 신약 성경책 사이즈로 만화 단행본이 나왔더랬다. 『 슈퍼 닥터-K 』 같은 게 선두 주자였는데 일본 이름을 한자 독음 그대로 써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나카는 밭 전(田)에 가운데 중(中)으로 쓰는데 그걸 전중으로 번역한 거다. "이 봐, 전중!" ← 이 따위 대사가 판을 쳤다. 물론 당시에는 전혀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주황색의 표지로 묶여 나온 『 닥터 슬럼프 』였다. 그림체도 마음에 들었고 재미도 있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같은 작가가 그린 작품이라며 나온 게 『 드래곤 볼 』이었다. 『 닥터 슬럼프 』와는 다른 그림체였지만 이내 빠져들었다. 당시 자잘한 특기라도 있으면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개뿔 내세울 게 없던 나는 『 드래곤 볼 』의 그림을 베껴 그려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림을 잘 그렸냐고? ㅋ

예체능 쪽에는 아예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난. 얇은 습자리를 만화책에 올려 똑같이 따라 그린 뒤, A4 용지 아래에 깔고 아둥바둥거리며 따라 그렸다. 한 번에 못 그리니까 여러 번의 펜질을 감추기 위해 두꺼운 펜을 썼더랬다. 레이 트레싱을 한 거다. ㅋ

 


 

ㅇㄷ빌라의 거실 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불법 복제되어 500원에 팔리던 만화 책을 본 기억이 생생한데, 습자지와 먹지를 동원해 그림 잘 그리는 척 하느라 쇼를 했던 기억이 어제 일 같은데, 그 일이 있도록 해주었던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일주일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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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니 프랑스 애들이 형광색으로 요란하기 짝이 없는 『 드래곤 볼 』 티셔츠를 입고 다니더라. 히로시마에서도 봤고 오사카에서도 봤다. 그러고보니 『 드래곤 볼 』의 단행복 안 쪽 날개에는 세계 각 국으로 수출되고 있다며, 프랑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수많은 유럽 국가 중 프랑스에서 유독 사랑받은 것도 신기하다.

 


 

어린 시절 간절히 기다리던 시간을 만들어준 사람이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없었다. 집에서 역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깔아줬네, 공항까지 깔아줬네 하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엄창난 인기를 누린 작가인데 정작 자식들 중 가업(?)을 잇는 사람은 없다더라. 그러거나 말거나, 전 세계에 토리야마 아키라 선생님의 뒤를 잇고자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대표적인 사람으로 『 원피스 』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가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명복을 빌 것이다. 그림에 병아리 눈꼽만 한 소질도 없는 나지만, 그 기도에 힘을 더해 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ご冥福(めいふく)をお祈りします。

 

安らかにご永眠(えいみん)されますよう、心よりお祈り申し上げ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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