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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일기 』

안식년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17.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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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에 입대해서 2004년 8월에 전역했다. 전역 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고 제법 즐거웠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돈은 형편 없었고 하고 있는 일 역시 나이 먹고도 꾸준히 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이 있었다. 그렇게 미래를 걱정하던 중에 새 직장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고 한 차례 물 먹은 끝에 입사하게 됐다. 그게 2007년 7월이다.

누구나 시작은 힘들었을텐데 나는 유난히 힘들었다. 내 성격이나 바라는 이상향 따위와 극단적으로 맞은 편에 있는 조직의 문화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고 직장 상사의 아들 결혼식 청첩장을 부치기 위해 야근을 마치고 우체국을 찾아가야 하는, 자존심을 구기는 일도 있었다. 쌍욕을 하고 얼굴에 침을 뱉은 뒤 발로 책상을 걷어차고 그만둬버리겠다는 상상을 매일, 정말 매일 매일 했다.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채 버틴 시간이 쌓이고 쌓여, 10년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중견이라 불리는 자리에 올랐다. 그 간의 경험이 쌓인 덕분에 불합리하다 생각하는 규정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도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년 때 못지 않게 힘들다. 나보다 어리거나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에게 꼰대로 취급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스스로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인지 어이없는 이유로 밟아대는 7HAH77I들에게 덤벼대던 시절보다, 후배들 눈치보는 지금이 더 힘들다. 남들은 직장 생활 어느 정도 했으니 편하겠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나마 남아있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다.


그럴 때 우연히 듣게 된 안식년.


안식년을 네×버에서 검색해봤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37388&cid=43667&categoryId=43667 라고 나온다. 귀찮거나 악성 코드 따위가 걱정되어 링크 누르는 게 꺼려지는 이들을 위해 여기 같은 내용을 써보자면, '안식일(7일)의 연장으로, 7년을 주기로 그 마지막 해인 7년째 되는 해를 말한다. 안식년은 땅을 위해 1년 동안 땅을 쉬게 해 주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이 해는 종에게 자유를 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전통이 있었으며 토지의 소유주나 토지가 없는 자가 모두 같은 입장이 되어 생활했다.' 라고 되어 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안식년 제도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발전을 위해 학업 등을 사유로 휴직이 가능하다. 모든 에너지가 소모되어 껍데기만 남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스스로 만족할만한 충전의 시간이다. 문제는... 진급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같이 입사한 사람들 중 빠른 사람은 이미 2년 전에 진급을 했다. 나는 올 해 진급을 한다 해도 동기들보다 3년이 늦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올 해 100% 진급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답답하다. 진급이 된다면 그저 기다리면 될 일이고, 안 된다면 덜컥 지르면 될 일인데... 어찔 될지 알 수 없다는 게 참 답답한 일이다. 계급이나 직위에 연연하지 않지만 진급이 될 경우 그 계급이 현 직장에서의 마지막 진급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지간하면 후배들한테 밀리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진급 딱! 하고... 어느 정도 노하우 넘겨주고 나면 바로 휴직계 던지고 껍데기만 남은 나에게 안식을 주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만 회사를 떠나 다른 환경에서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면 여러가지로 배우는 게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카야마에서 1년 동안 유학을 빙자한 장기 여행을 즐기면서 그동안 번 돈 까먹고 싶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이 먹고 정신 못 차린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책임지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 끼치는 일도 아니니 뭐가 어때! 라는 생각인 것이다. 당장은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준비하기 시작하면 피곤한 일 투성일 것이다. 여기저기 벌려놓은 빚도 다 갚아야 할 것이고, 차부터 시작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은 일 투성일지라도 익숙한 지금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이라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 마음 먹고 해도 결국 남만큼 못하더라. 여행 다니면서 사진 찍고 글 써서 여행 작가로 먹고 사는 게 꿈인데... 나 정도 사진 찍고 나 정도 글 쓰는 사람은 사방에 널리고 널렸더라. 결국 그걸 업으로 삼을 수 없으니 다른 업으로 벌어서 잠시 쉴 때 좋아하는 여행을 즐기는 방법 뿐이다. 그런데... 모 숙박 업체 광고처럼 그 곳에 살아보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 머무는 걸로 만족할 수 없는 여행지가 있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고자 한다는 핑계를 대고 긴 시간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부디 내년 겨울에 이 글을 다른 나라에서 보면서 배 부른 소리 할 때가 있었구나~ 하고 후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후회하게 될 미래조차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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