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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미 』/『 영  화 』

한산: 용의 출현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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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 되시겠다. 2014년에 개봉하여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남게 된 『 명량 』의 후속편인데 시대적으로 따져보면 명량 해전보다 앞선 이야기다. 견내량 해전으로 불렸던 한산도 대첩은 1592년 7월에 있었고, 명량 해전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에 있었다.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인 노량 해전은 1598년 11월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조선을 돕고자 파병된 군사를 지휘하던 진린이 왜군에 둘러싸여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고자 나섰다가 이순신이 전사하고 만다.)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니까 관련 지식이 있으면 그만큼 더 보일 게다. 조선과 일본의 전쟁인데 일본 쪽이 처들어온 거니까 일단 일본 쪽의 흐름을 한 번 보자.

당시 세계 무역(을 빙자한 약탈과 식민지化)을 주도한 건 포르투갈네덜란드였다. 일본 역시 두 나라의 배가 드나들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이 들어온다. 조총 전에는 말 탄 장수가 최고의 전력이었다. 전쟁에 있어 상대가 없었다는 다케다 신겐 역시 잘 훈련된 기마병의 힘으로 주위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의 위력을 일찌감치 깨닫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 부대가 전투에서 대활약하면서 주변국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는다. 이 때 다른 지역에서 싸움질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회군, 잽싸게 권력을 잡는다. 권력 서열 2위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저 한 발짝 물러서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는다.

 

일본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이유로 조선을 침공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임진왜란은 국사 시간에 반드시 배우는 사건이지만 일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이라 하면 당연히 모르고, 분로쿠-게이초의 역이라고 해야 알까 말까인데 그마저도 바로 뒤에 이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겨울/여름 전투에 비하면 비중이 훅~ 떨어진다. 저들이 처들어왔다가 진 전쟁이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입시용으로 널리 활용된다는 '일본사 교실'이라는 책에서도 116~117 페이지, 달랑 두 쪽이다. 그나마 116 페이지 중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채 한 장이 안 되는 분량이다. 조선 수군의 영웅 이순신의 활약 등(朝鮮水軍の英雄、李舜臣など)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연호도 꾸준히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6년까지 사용한 연호이고, 지진 등의 자연 재해가 잇따르자 1597년으로 넘어가기 전에 바꾼 연호가 게이초다. 즉, 분로쿠-게이초의 역은 전쟁이 일어난 시기의 연호에 '역'이라는 말을 붙여 교묘하게 저들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걸 피해가는 말이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오사카 성 등에서는 조선 출병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 때 당시의 천황은 바지 사장이고, 실질적인 모든 권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쥐고 있었다. 명나라를 치러 갈 건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 같잖은 소리로 조선에 처들어온 게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조선에 처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진짜로 명나라를 칠 생각이었다, 명나라 뿐만 아니라 인도를 거쳐 서방으로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명나라는 핑계고 조선만 노렸다,...

이 때 당시 일본은 공을 세우면 땅을 주는 걸로 포상을 했는데 더 이상 줄 땅이 없어지자 조선을 노렸다는 얘기도 있다. 뭐, 이건 별에 별 얘기가 다 나오고 있는지라 의견이 다양하다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영화에서는 세 척이 선두에 서서 적을 유인한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다섯 척이 들어갔다. 사도 첨사 김완(영화에서는 김구택이 배역을 맡았다)과 광양 현감 어영담(안성기가 연기했다)이 그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왜군의 정찰선 다섯 척이 조선 수군의 배와 본대를 육안으로 식별한 뒤 배를 돌려 육지 쪽으로 도망간다. 유인하는 거다.

조선 수군은 유인이라는 걸 알면서 낚이는 척 하고 쫓아간다. 순순히 쫓아오니까 저들도 이상하다 싶었겠지. 조선 수군의 유인책일지 모른다며, 일단 본대까지 끌려들어오는지 보겠다고 잠시 기다린다. 그런데 조선 수군의 본대는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견내량 입구에서 대기한다.

달랑 다섯 척이 기를 쓰고 쫓아가더니 왜군의 본대 앞에서 멈춰 서서 활로 도발한다. 욱! 하고 일본 선발대가 간격을 좁히며 다가오니 포를 쏘며 대응한다. 30분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왜군과 조선 수군 선발대의 간격이 가까워져 급기야 백병전까지 벌어진다. 본대에서 재빨리 후퇴 신호를 보내고, 유인 역할을 맡은 다섯 대가 배를 돌린다. 이에 맞춰 본대도 배를 돌려 도망가기 시작한다.

미끼가 아닌가 의심하던 왜군은 본대마저 도망가기 시작하니까 이 때다 싶어 쫓아오기 시작한다. 왜군이 방화도에 도달하자 조선 수군은 학익진을 펼치기 시작한다. 여도 권관 김인영이 다른 함대보다 늦어 진의 완성이 늦춰지게 된다. 이 때 거북선이 추격하던 왜군 앞을 가로 막으며 속도를 늦춘다.

영화에서는 이억기와 원균이 모두 학익진에 참가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매복하고 있다가 진이 완성되고 사정 거리 내로 왜군이 들어간 뒤 뒤를 막는 역할을 했다. 조선 수군에 포위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왜군은 돌격으로 진을 뚫고 나갈 생각을 했지만 집중된 포화에 개박살이 나고 만다.

 


 

이 때를 맞춰 물살이 바뀐다. 바뀐 물살을 타고 순천 부사 권준을 비롯해 여러 장수들이 와키자카를 노리고 덤벼든다. 결국 대장선은 파괴되고 와키자카는 소형 목선으로 옮겨 탄 뒤 도망을 가 한산도에 정박한다. 쫓아가던 조선 수군이 이들의 배를 태워버린다.

왜군은 섬에 있던 원주민을 약탈하며 버틸 생각이었는데 당시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를 빙빙 돌며 탈출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미역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가, 원균이 경상 우수군의 철수를 명하면서 포위망이 풀린다. 그 틈을 타 뗏목을 만들어 탈출한다.

 


 

영화에서는 학익진을 바다의 성이라 말하며 적을 유인해 수세를 공세처럼 활용한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던데, 이순신의 대단한 점은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싸웠다는 데 있다. 당시의 화포는 명중률이 떨어져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본이 선호하는 백병전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순신은 지형을 파악하고, 물살 역시 미리 알아낸 뒤 대충 쏴도 맞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낸 거다. 열 발 쏘면 한 발 맞을까 말까 했는데 대충 쏴도 사방이 적이라 다 맞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대승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다.한산 대첩이야말로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이순신을 제대로 보여준 전투가 아니었나 싶다. 명량 해전은 천운에 천운이 더해진, 이순신마저도 하늘이 도왔다고 할 정도로 운에 맡긴 싸움이었고.

 


 

예전에는 조선 수군의 배는 나무를 격자 형식으로 짜맞춰 튼튼한데 왜군의 배는 약해서 들이 받아 가라앉혀 버렸다며, 충파를 돌격형 충돌 공격이라고 가르쳤더랬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단다. 충파가 충돌 공격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또(!) 들이받아 가라앉히는 걸로 충파를 설명하고 있으니,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거북선 = 철갑 돌격선으로 생각할까봐 걱정이다. 당시 거북선의 최대 속도가 3knot였다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바꾸면 6㎞/h도 안 된다.  판옥선도 시속 8㎞가 채 안 되는 속도였단다. 성인 남성의 빠른 걸음 정도의 속도로 들이받아 박살낼 수 있을리 없지. 지금처럼 연료를 사용해서 추진하는 기관이 붙은 배도 아니고. 적을 들이받아 가라앉힌다는 건 실제하지 않는 이야기다.

물론 얼마 전의 대한민국 해군은 북한 놈들을 상대할 때 충돌 전술을 펼쳤다. 휴전 중이니까 확전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NLL을 침범한 적을 밀어내는 기동이다. 들이받겠다고 접근하는 배에 포를 쏴버린 게 연평해전이고. 그래서 우리의 교전 수칙도 3단계로 줄어들었다. 아무튼, 해군들이 진짜 고생 많은데 진급도 안 시켜주고 대접은 소홀하다. 사실 상 섬과 같은 나라에서 해군 전력 좀 제대로 키울 생각 안 하고 그저 60만 육군 고수하고 있는 꼴통 AH 77I 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에서는 듣보, 한국에서는 이순신과 여러 차례 맞서 싸운 용장, 오히려 한국에서의 평가가 더 좋은 편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기습으로 용인에서 훨씬 많은 조선 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사상자가 많은 전투는 아니었다.

아무튼, 와키자카는 오우미(지금의 시가 현)를 지배하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다. 아자이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해 멸망하자 아케치 미츠히데(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걔 맞다.) 밑으로 들어간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으로 줄을 서면서 또 다시 주인을 바꾸고, 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는다.

한산 대첩으로 개박살이 나고, 한산도에 갖혀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가까스로 탈출한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받든 세력)에 속해 있다가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으로 갈아탄다. 기똥차게 살아남는고만. 가문이 유지되어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며, 한산 대첩이 있었던 날(음력 7월 8일)에는 지금도 미역만 먹는단다. ㅋ

 


 

한국에서 와키자카를 빨아준다면 일본에서는 거북선을 미친 듯 빨고 있다. 이순신의 활약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거지. 뭔가 시대 파괴적인 무기가 있었을 거라는 망상이 시작됐고 그 무기는 거북선으로 낙찰. 철갑을 두른 고속의 돌격선으로 둔갑하게 된다.

기록에 환장한 조상님들답지 않게 거북선과 관련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인지라 2층인지 3층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2층 구조라는 설이 대세였는데 그렇게 되면 화포를 쏘는 층과 노를 젓는 층이 같은 공간에 위치하여 서로 간섭하게 된다는 이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3층 설이 대세다. 다만, 뚜껑(?)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는데 나무 판자로 덮은 후 칼과 창을 꽂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복원된 거북선은 하나 같이 덮개가 철판이다. 이건 일본 애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뭐, 영화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 했다고 생각하는데... 『 탑건: 매버릭 』이 극장을 나오면서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반면, 『 한산: 용의 출현 』은 그냥 '재미있네.'가 전부였다. 다시 볼 생각까지는 안 들더라.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 그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실제 배를 띄우지 않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저런 해전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대단하다. 『 반도 』 따위의 컴퓨터 그래픽과 비교하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

선조 같은 쪼다 AH 77I 가 임금 자리에 앉아 있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 같은 희대의 명장이 있었다는 게, 이름 없이 죽어간 민병들이 있었다는 게, 그저 대단하고 감사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어쩜 수백 년 전과 지금이 전혀 다르지 않을꼬.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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