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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미 』/『 영  화 』

더 퍼스트 슬램덩크 (The First Slam Dunk, 2022)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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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캡콤의 대전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때도 똥손이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없었더랬다. 스틱을 잡는 시간은 찰라였고 서서 구경하는 시간이 그 몇 배였다. 조작이 서툴러 승룡권은 어림도 없던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오락실에는 휴거 어쩌고 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992년. 중학생이 되었다. 반 대항 축구가 큰 인기였다. 집 근처 시장의 신발 가게에서 만 원 주고 산 짭퉁 나이키, 짭퉁 엘레세 운동화는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매 월 운동화를 사야 했다.

 


 

1993년. 농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옷만 갈아입고 농구 공을 든 채 코트로 나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기술을 구사하며 내가 너보다 낫네, 마네, 中二病(중이병) 대전이 벌어졌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소년 챔프' 발매 다음 날이면 교실에서 어김없이 「슬램덩크」를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들고 와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보고 난 뒤 학교에 가지고 왔더랬다. 자연스럽게 순서가 정해졌고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 녀석 손에서 저 녀석 손으로 넘어갔다. 수업 시간에 보다가 뺏기는 녀석이라도 나오면 그 녀석은 엄청난 구박을 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재주 좋은 녀석이 옆 반에서 수명을 다해 너덜너덜해진 걸 급히 모셔(?)오기도 했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엄청난 경기를 펼쳤다. 성적으로는 근처에도 못 갈 녀석들이 연세대가 강하네, 고려대가 강하네, 편을 나눠 시합을 했다. 키 작으면 가드, 크면 센터, 나머지는 알아서... 라는 포지션 설정이었기에 같은 포지션끼리 편을 나눴지만 연고전(내가 연세대 팬이었기 때문에 연세대를 먼저 썼다)이 있고 나서는 팀 밸런스고 나발이고, 응원하는 팀이 같은 녀석들끼리 한 편을 먹었더랬다.

농구 붐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축구 서클 밖에 없었는데 한 학년 선배를 중심으로 농구 서클이 만들어졌고 창설(?) 멤버로 11번을 거머쥐었다. 다른 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팀들과 매 주 시합을 했고 원정도 다녔다. 사방에서 3 on 3 대회가 있었던 시절인지라 지역 대회에 참가해서 상도 받아왔고.

 

그 시절, 교과서보다 많이 봤던 게 「슬램덩크」였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이미 본 걸 또 보고 또 봤다. 대사는 물론이고 특정 장면의 구도와 펜 터치마저 기억할 정도였다. 얇은 습자지를 대고 베껴 그린(트레이싱) 뒤 진한 펜으로 다시 그리고, 그 위에 A4 용지를 올려 또 따라 그렸다. 그리고 나서 마치 내 실력으로 그린 듯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농구에 빠져 지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한 아저씨에게 경전과도 같은 그 작품이 극장에 걸린단다. 지난 해 11월, 3년만에 일본 땅을 밟았는데 「은하영웅전설」 을 보러 간 극장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현지에서 11월 11일에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을 2위로 밀어내버리며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를 보며 세월이 지나도 팬덤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상영할 줄 알았는데 결국 해를 넘기더라. 한국에서의 개봉은 1월 4일. 낮 근무를 마치고 근처의 극장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대부분이 배 나온 아저씨들. 어설프게 크로스오버(다리 사이로 드리블하는 기술)를 선보이던 아이는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동반하고 극장을 찾았다.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딱히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다. 북산산왕의 경기를 다룬 작품이고 송태섭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또래보다 한참 작은 키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드를 맡았던지라 같은 포지션의 송태섭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오리지널 스토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이 있다. 송태섭이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점,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점, 얼마 지나지 않아 농구부 에이스였던 형이 바다 낚시 사고로 죽었다는 점 등이다. 생각해보면 송태섭의 엄마는 무척이나 기구하고나. 남편에 이어 장남마저 떠나보내야 했으니 말이지.

 


 

아무튼. 가장 먼저 든 소감은 어설프게 만화 아닌 척 하지 않아서 좋다는 것? 최근의 애니메이션은 디지털 운운하며 만화가 아닌 척, 실사인 척 쇼하는 꼴이 무척이나 같잖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굵은 펜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화라서 누가 봐도 만화인데, 색상이 쨍~ 하지 않고 다소 뭉개 놓은 듯해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스포츠 애니메이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움직임의 어색함도 없다. 실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엄청나게 잘 그려냈다. 워낙 빠른 순간에 이루어져 대체 뭐가 지나간 건가 싶을 정도로 휙~ 휙~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눈으로 움직임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데도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진행이 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 더빙으로 봐야할지, 자막으로 봐야할지 고민했더랬다. 강백호 대신 사쿠라기 하나미치(桜木花道), 서태웅 대신 루카와 카에데(流川楓)로 나오면 적응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자막판 역시 한글 이름을 사용했다.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보고싶어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나는 100% 만족했다. 다만, 의역이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송태섭이 바이크 사고로 병원에 누웠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엄마가 내뱉은 원래의 대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였지만 '죽고 싶어서 그래!' 정도로 번역이 되었더라. 강백호가 서태웅에게 여우(키츠네)!라고 하는 부분도 음성은 분명히 들리는데 자막에서는 생략되어버렸고. 아예 못 알아들으면 모르겠는데 어설프게 들리니까 자막을 검수하고 있더라. 선무당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원작은 여기저기에서 깨알 같은 개그 컷을 볼 수 있지만 극장판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이 덜어졌다. 하지만 아예 덜어낸 게 아닌지라 숨은 개그 컷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블럭(상대 슛을 손으로 쳐내어 수비하는 기술)에 실패한 채치수 뒤에서 불쑥 솟아올라 상대 공격을 막아낸 강백호가 스윽~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요구한다. 채치수가 강백호의 손을 내리치며 멋지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에 이어 벌겋게 퉁퉁 부은 손을 부여잡고 징징대는 강백호의 개그 컷이 이어진다. 만화에서는 저 개그 컷이 메인이지만 극장판에서는 아웃된 공을 동료에게 패스하는 장면 뒤로 공격을 위해 뛰어나가는 강백호가 퉁퉁 부은 손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순식간에 휙~ 지나가는 거라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좋은 장면이다.

 


 

일본에 갔을 때 조금 놀랐던 것 중 하나가 학교 운동장에 농구 골대가 없다는 거다. 내가 본 학교라고 해봐야 몇 개 안 되니까 일반화할 수 없기는 한데, 오사카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운동장에 골대가 박혀 있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농구는 기본적으로 코트 위에서 하는 실내 스포츠이고, 일본은 실내 스포츠를 실외에서 즐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 나라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료 실내 코트를 이용한 적이 있는데 가격이 상당히 비쌌지만 시설은 훌륭했다.

거기에서 어린 아이들이 드리블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자기 키만한 공을 튀기고 있던 여자 아이가 제대로 공을 눌러가며 드리블하고 있더라. 손바닥으로 탕! 탕! 내려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눌러가며 드리블하고 있었다. 게다가 방향 전환이라던가 핸들링도 훌륭했다. 기본을 제대로 가르치는고나 싶더라.

 

2019년 03월 16일 토요일 흐림 (NKS-405에서 친구들과 농구)

 

2019년 03월 16일 토요일 흐림 (NKS-405에서 친구들과 농구)

새벽에 깨서 태블릿 만지작거리다가 한 시간을 홀랑 까먹었다. 하루에 태블릿으로 유튜브 보느라 까먹는 시간이 최소 두 시간이다. 나~ 중이 되면 그 시간을 후회할 것 같다. 자기 전에 태블릿을

40ejapan.tistory.com

 

그 때의 어린 아이가 보여줬던 드리블을 영화 초반에 송태섭(의 어린 시절)이 보여주었다. 코트에 탕~ 탕~ 울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 했다. 마지막으로 코트에서 공을 튀겨본 게 언제였던가.

 


 

사운드가 고루 퍼지지 않고 뭉치는 상영관이었다는 점, 끝나자마자 손전화를 꺼내들어 안구 테러하는 개념없는 AH 77I 들이 여럿 있었다는 점 때문에 조금 언짢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한 번 더 봐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정말 잘 만든 작품이었다.

 

 

이 겨울에, 집 근처의 대학교 농구장에 가볼까, 잠시 고민했더랬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여운이 남아 가슴이 몽글몽글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작품, 「슬램덩크」 덕분에 앨리웁(alleyoop: 동료가 던져 올린 공을 공중에서 받아 바로 슛하는 기술. 극장판 초반에 송태섭이 던져 올린 공을 강백호가 바로 내리 꽂아버리는데 그게 앨리웁 덩크다.)을 아리우프(アリウプ)라 불렀던, 이제는 5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40대 아저씨들. 어쩌면 나와 전국 여기저기에서 살을 부딪치고 손가락을 엇갈렸을지도 모르는 인연의 꼰대들. 이 작품은 다들 보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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