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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미 』/『 등  산 』

2012년, 1박 2일 동안 지리산에 업혔다 왔습니다.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1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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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처음 간 건 지난 2010년이었다. 말로만 들었지, 어떤 산인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갔었다. 죽는 줄 알았다. 체력이나 등산은 남들보다 나은 편이라 자부했지만 한 방에 무너졌다. 정말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더라. 그런데... 다녀오고 나니 그 고됨이 매력인지라, 1년에 한 번은 지리산에 가기로 했다. 2011년에도 갔다. 그나마 한 번 다녀왔다고, 좀 덜 힘들긴 하더라. 그래도 만만치 않은 산이 지리산이다.

 

2010년 중산리 → 로타리 대피소 http://pohangsteelers.tistory.com/396

2010년 로타리 대피소 → 천왕봉 http://pohangsteelers.tistory.com/397

2010년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http://pohangsteelers.tistory.com/398

2010년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http://pohangsteelers.tistory.com/399 

2011년 중산리-로타리-중산리  http://pohangsteelers.tistory.com/667

 

당연히 이번 해에도 지리산에 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정 멤버 두 명이 모두 연애질하느라 바빠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가한 건 나 뿐... -_ㅡ;;;
당일치기가 어려운데다 1년 동안 술/담배/스트레스/야근 덕분에 몸이 너덜너덜한 상태였기에 같이 못 간다는 핑계로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매 년 가자고 다짐한 지 고작 3년 차 접어들어 접게 된다는 건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지 못하지만 나 혼자라도 가서 기록(?)을 이어가자는 욕심이 생겼다.

 

 

포기하자와 가자 사이에서 혼자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뒤 일단 대피소부터 예약을 했다. 지리산에는 여러 대피소가 있는데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을 해야 한다. 홈페이지(http://jiri.knps.or.kr/) 가서 회원 가입한 뒤 예약하면 된다.
날 추워지면 침낭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배낭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8월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 9월에도 한 차례 예약을 했지만 근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

 

 

결국 10월에나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니 산에서는 추울 게 뻔한 일. 이렇게 되니 더욱 더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지만 어떻게 해서든 연속 등반 기록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더 컸다.

 

 

출발하기 하루 전, 근무 중 한가한 시간을 틈 타 필요한 준비물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퇴근해서 배낭을 꾸렸다. 춥다고 할 정도로 날이 쌀쌀해지긴 했지만 산을 오르다보면 땀이 날 게 뻔하니 갈아입을 옷을 넉넉하게 챙겼다(1박 2일 일정이라면 세 벌이 기본이다. 대피소까지 가는 날 한 벌, 천왕봉 거쳐 내려올 떄 한 벌이면 벌써 두 벌이다. 그 옷들은 이미 땀에 흠뻑 젖을 게 분명하니 대피소나 하산 때 갈아입을 옷을 최소(!) 한 벌은 더 챙겨야 한다. 하의는 그냥저냥 버틸 수도 있겠지만 상의는 ×박 ○일의 경우 ○+1로 챙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지난 두 차례 경험으로 터득한, '배 고프면 끝장이다!' 신념(?)에 따라 먹을거리를 열심히 준비했다. 일단 집에 있는 닭슴가살 통조림을 챙기고, 물 부으면 부글부글 끓는 고체 연료팩을 준비했다. 그리고 오이와 ㅂㅇ 토마토를 사기 위해 밖에 나갔지만 늦은 시각이라 구입에 실패했다. ㅠ_ㅠ

결국 먹을 건 참치 통조림 두 개, 닭 슴가살 통조림 두 개, 초코바 여섯 개(짧은 걸로 두 개 든 거×3), 구운 닭알 정도로 준비 끝.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잠이 안 와 새벽 두 시까지 뒤척거리다 잠 든 탓에 눈 뜨니 여덟 시였다. 세수도 안 하고 전 날 챙겨둔 옷만 후다닥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차에 배낭을 싣고 빠진 것 없다 대충 확인한 뒤 출발!
출근 시간이랑 맞물리니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획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난 때문인지 막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중산리 탐방소 찍고 부은 눈 비비며 출발했다.

느긋하게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다. 밥 먹으려 하는데 식당에 노란 병아리들이 바글바글~ 근처 유치원에서 소풍이라도 가는 모양이다. 어찌나 재잘거리는지. ㅋ   거기다 음식 나오면 정체 불명의 멜로디로 노래까지 불러댄다. 소음(?)은 무척 싫어하지만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 -ㅅ-

밥 먹고 나와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 사들고 다시 출발. 졸리지는 않았지만 내려가는 도로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기고 싶어 졸릴 때 차 세워두고 자라는 임시 휴게소(?)에 차 세우고 사진 몇 장 찍었다.

 

 

네 시간 조금 넘게 달려 도착했다. 중산리 탐방소로 가는 길은 예전과 다를 게 하나 없다. 가는 길에 왼 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오른 쪽에는 작은 정자가 있는 멋진 핫 플레이스가 나온다. 예전부터 사진 찍고 가자 욕심내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별로 관심없어 보여 그냥 지나쳤는데... 휙~ 지나쳤다가 차 돌려서 기어코 사진을 찍었다.

 

 

온통 감나무. 주황색으로 잘 익은 감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가 중산리 탐방소 가는 길까지 계속 보인다. 차 세워두고 좀 따볼까 싶었지만 사유 재산일런지 모르니 쓰잘데기 없는 짓 말고 감상만 하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쳤다.

 

일찌감치 가을을 맞이한 단풍 나무. 고즈넉한 시골 길. 이 근방 어디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나 말고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시원한 바람 맞으며 달려 중산리 대피소에 도착했다. 주차비는 하루 5,000원이다. 난 1박 2일 일정이라 '내일 나갑니다~' 라고 했더니 알아서 두 장 끊어준다. 주차비로 10,000원 지출.

평일이라 주차장이 널널하다(주말에 오면 차 세울 곳 없을 정도로 빽빽함). 차 세워두고 배낭에서 스포츠 밴드를 꺼내 종아리에 붙였다. 방수팩을 배낭에 씌운 뒤 슈퍼로 가서 이온 음료를 두 개 샀다. 가지고 간 물통에 쏟아 붓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기분 좋게 출발. 출발할 때 중년 아저씨와 아주머니 팀이 있었는데 차 시간 얘기하기에 하산해서 터미널 가려 하시나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법계사 가는 차 타고 가서 로타리 대피소 가려고 버스 기다리는 분들이었다.

 

중산리 탐방소를 지나면 나오는 완만한 경사의 시멘트 포장 도로. 법계사 다니는 콤비 버스나 공사 차량이 다니는 길이라 포장이 되어 있다.

 

포장된 도로를 천천히 걷다 보면 다리가 나온다.

 

많이 가물었는지 쏟아지는 물이 어째 영 비리비리하다. 지리산에 처음 온 2010년, 이 다리 위에서 우와~ 우와~ 했던 게 기억난다. 훗... 지옥 문 여는 것인지도 모르고. -ㅅ-

 

중산리 탐방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천천히 길 따라 오른다. 경사도 그리 가파르지 않고 길도 평탄한 편이라 힘들거나 하지는 않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길 곳곳에 작은 도랑이 흐르게 되어 좀 더 힘들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많이 가물 때라 도랑 건너 뛰느라 체력 소비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물 흐르는 소리가 왼 쪽으로 크게 들린다. 숨은 가빠지지만 물 흐르는 소리와 깨끗하게 보이는 나무들 보며 기분 좋게 산을 오른다.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면 칼바위에 도착하게 된다. 안내도에 한 시간 반 거리라고 되어 있는데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난 걸음이 잰데다 산도 그럭저럭 타는 편이라 30분만에 도착했다. -ㅁ-
배낭 내려놓고 사진 찍고 있는데 나보다 늦게 출발한 아저씨가 와서 몇 마디 나눴다. 잠깐 쉬고 다시 출발.

 

칼바위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작은 쉼터가 있다. 이 쉼터는 내려오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닌가 한다. 오르는 사람은 이미 칼바위에서 적당히 쉬었을 게 분명하니까.

 

작은 공터에서 로타리 가는 길과 장터목 가는 길이 갈린다. 경사는 로타리 가는 길 쪽이 더 심하지만 거리는 장터목 쪽이 압도적으로 멀다. 뭐, 둘 다 가장 힘든 코스라 별 의미 없긴 하다. 어디를 선택하든 힘들다. -ㅅ-

 

도토리 알밤 가지고 소풍 가는 다람쥐는 옛날 이야기다. 탐방객이 주는 음식에 적응이 된 이 녀석들은 발소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가면 오히려 그 앞을 알짱거리고 있다. 그 모습이 뭔가 던져주기를 바라는 듯 하다.
지리산 반달곰한테 음식 주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산리에서 칼바위까지는 그냥저냥 갈만하지만, 칼바위를 거쳐 로타리를 향하는 길은 경사가 무척이나 심하다. 어지간하면 입 열지 말자고(힘으로 호흡하면 코로 호흡할 때보다 체력 소모가 더 크다) 다짐했건만, 나도 모르게 입이 열린다.
혼자 가니까 심심해서 엠피삼 플레이어로 노래 들으며 갔는데, 인이어 이어폰을 쓰다 보니 답답한 기분도 들고 해서 빼버렸더니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냥 가기가 아쉬워 결국 볼륨을 가장 크게 키운 뒤 목에 이어폰 걸치고 올라갔다.
북한산 갈 때 동네 떠나라 스피커로 트로트 틀어놓고 등산하는 아저씨 보며 혀를 찼는데... -ㅅ-

 

저처럼 혼자 지리산 오르는 분이라면 심심하니까 엠피삼 플레이어나 손전화를 이용해 좋아하는 노래나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경우가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될 수 있으면 인이어(귀에 쏙 들어가는) 이어폰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인이어 이어폰은 밀폐형 이어폰이기 때문에 장시간 착용할 경우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외부 소리를 차단하기 때문에 산길을 걸으며 소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모두 막혀 버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1. 산에서 걸을 때에는 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들리는 정보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밟는 땅에서 나는 소리나 주위 소리를 잘 들어야 하는데 이어폰 때문에 이러한 소리를 놓칠 경우 다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2. 지리산에는 반달곰이 삽니다.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이어폰 때문에 접근한 야생 동물을 인지하지 못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3. 산이 험하다 보니 오르고 내리며 만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자주 나눕니다. 대개 수고하세요, 좋은 산행 되세요 같은 가벼운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어폰 때문에 상대 인사를 못 듣게 됩니다. 인사했는데 대꾸도 안 하고 그냥 휙~ 지나가면 인사한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는 않지요. 쉽지 않은 산입니다.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힘 내라, 즐겁게 오르내리자, 하는 차원에서 인사합시다~ ^_^;;;

 

경사가 엄청난 나무 계단. 정비된 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다.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리는 게 느껴진다. 무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시로 쉬면서 올라갔다.

※ 젊을 때에는 등산 중 쉬는 걸 시간으로 따졌습니다. 40분 오르고 5분 쉬고,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른 넘으면서부터는 그렇게 시간으로 쉬지 않습니다. 그저 몸이 힘들면 쉽니다. 물론 잦은 휴식은 페이스를 잃게 만들어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마른 수건이 없어 젖은 수건으로 몸을 완전히 닦아야 하는데 물 몇 방울 묻었다고 쥐어 짜는 걸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몸이 힘들다고 하소연 하고 있는데 참고 오르는 건 미련한 겁니다. 몸이 아프다는 건 그 파트(?)에 뭔가 과부하가 걸린 겁니다. 조금 힘들다 싶을 때 쉬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강력한 태풍의 영향인지 오르는 길 여기저기가 망가져 있었다.

 

헉헉거리며 걷다보니 어느덧 망바위다. 지나온 거리가 남은 거리의 두 배 이상이 되는 지점이다. 법계사까지 1㎞ 남았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운내면 된다(법계사 바로 아래가 로타리 대피소임). 이미 해발 고도 1,000m 넘었다. ㅋ

 

망바위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 날씨 정말 최고다!

 

흘러내린 땀으로 상의는 잔뜩 젖은 지 오래, 무척 덥다가도 잠깐 쉬는 동안 불어온 바람이 체온을 앗아가 이내 쌀쌀함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만 느껴지고. 하지마 걸으며, 쉬며 바라본 이런 풍경이 있기에 기운내서 산을 오른다.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들려 하늘을 보니 헬리콥터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아마도 로타리 대피소나 법계사에 필요한 물건을 나르거나 쓰레기를 나르는 모양이다. 엄청 시끄럽다. 가까이서 소리가 들리니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고무 판떄기 깔린 이 길이 나오면 로타리 대피소가 머지 않았다는 거다. ㅋ

 

산을 오르다보면 이런 표지 기둥이 보인다. 눈여겨 보는 것이 좋다. 현위치를 알릴 수 있는 번호와 이정표, 통신 가능한 이동통신사 등이 표시되어 있다. 상당히 유용하다.

 

헬기장에 도달했다. 로타리 대피소가 코 앞이다.

 

산 아래부터 위로 가을이 올라가고 있다.

 

로타리 대피소에 도착!

 

중산리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로타리 대피소에 도착해버렸다. -ㅁ-   너무 일찍 왔다. 너댓 시간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일단 배낭 내려놓고 닭알을 까먹었다. 대피소에는 학생들이 한 무리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선생님과 체험 학습 온 거라고 한다. 대단하다 싶더라. 남학생은 둘인가 셋 밖에 안 되는데 여학생은 꽤 되더라. 경상도 사투리가 정겹다.   땀이라도 씻어내야(수건에 계곡 물 적셔 땀만 닦아내는 식으로 씻었었다) 하는데 어린 학생들이 식수대 쪽으로 계속 들락거려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잠깐 혼자 있을 때 물수건으로 미친 듯 땀 닦아내고 옷 갈아입었다. -ㅅ-

대피소에 배낭 던져두고 맥주와 크래미 꺼내서 혼자 홀짝거렸다. 칼바위에서 만났던 아저씨와 출발 전 매점에서 만난 아저씨/아줌마 팀이 나보다 늦게 도착했다. 간단하게 인사만 나눴다.
대피소는 예약한 사람들에게 자리 배정을 하는데 이게 17시부터다. 10여분 일찍 하니까 원하는 자리가 있다면 16시 50분 즈음 매점 앞을 기웃거리는 것이 좋다. 콘센트를 이용하기 위해 문(창) 쪽 구석 자리를 원했지만 늦어버렸다. -ㅅ-   가지고 온 맥주도 다 먹었겠다,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일찌감치 자리를 폈다. 모포는 하나에 1,000원을 받고 빌려준다. 두 장 빌리려다가 생각보다 춥지 않아 한 장만 빌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폈다.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DMB로 야구(두산 vs 롯데, 준 플레이오프) 중계 봤다(실내에서 안 잡히면 밖에서 DMB 채널 검색 후 안에서 보면 된다). 보다가 졸려서 이어폰으로 소리만 들으며 잠을 청하는데 잠자리가 바뀐데다 좁아서 좀처럼 못 자겠다. 로타리 대피소 세 번째 이용하는 건데 꽉 찬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내 오른 쪽에는 칼바위에서 만난 아저씨가 고량주 두 병 비우고 누워 코 골며 자고. 왼 쪽에는 늦게까지 술 먹고 들어온 아저씨 네 명이 누워 있었다.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킥킥거리며 까불고 장난치다가 다른 누군가가 "주무십시다!" 하니 조용해지더라. 조금만 늦었다면 육두문자 뱉어낼 뻔 했다. -ㅅ-   나이 먹거나 안 먹거나 유치한 건 똑같다. -ㅁ-
꼬랑내 진동하지, 여기서는 코 골고, 저기서는 이 갈고, 좁아서 어깨와 어깨가 닿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10분 자다 깨서 30분을 누워 있기를 반복했다.

 

새벽 네 시가 되자 일출 팀이 부시럭거리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전 날 날씨가 제법 흐려 일출을 포기한 나는 혼자 짜증내며 계속 잠을 청했다. 나중에 어! 하며 일어나보니 학생 팀들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밖에 나가보니 해가 쨍쨍. 젠장... 이럴 줄 알았음 나도 일출 보러 새벽에 나가는 건데. ㅠ_ㅠ

너무 피곤해서 눈도 안 떠지는데 세수도 안 하고 짐부터 정리했다. 물수건으로 대충 얼굴 닦은 뒤 선블록 스프레이 뿌리고 담배 한 대 피운 뒤 출발.

 

올 해까지는 대피소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게 가능하지만 2013년부터는 아예 흡연 금지란다. 애연가들은 산에 올라 맑은 공기 마시며 푸우~ 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흡연자의 권리도 소중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소중한 국립공원이 민둥산이 될 수 있으니 금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전 날 잔뜩 찌푸려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듯 시퍼렇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 구름이 발 아래 깔리기 시작한다.

 

내리 3년째 오니 길이 상당히 익숙하긴 하지만 저런 게 있었나 하는 곳도 간간히 나온다. 개선문에서 셀카 몇 장 찍고 다시 천왕봉을 향해 출발.

 

1㎞도 남지 않았다. 길은 점점 가파르지만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기에 기운을 짜낸다.

 

오르고 또 오른다. 돌로 된 길도 오르고 정비된 길도 오른다. 배낭은 점점 어깨를 짓눌러오고 다리는 떨려온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거의 다 왔다, 주문 외우듯 되뇌이니 오르고 또 오른다.

 

그렇게 해서 남강 발원지에 도착했다. 여기서 물을 좀 떠가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바가지는 사방에 널부러져 있고 물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샘이 솟는 곳을 잘못 짚었나? 싶어서 이리저리 둘러봐도... 없다. 아래에서 올라올 때부터 많이 가문 모양이다, 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물이 아예 없을 줄이야. -ㅅ-
출발할 때 떠온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왔는데 낭패다. 천왕봉 찍은 뒤 장터목 갈 때까지 물을 보충할 수가 없다.
내용 추가 : 어제 도서관에서 지리산 관련 책을 봤는데 갈수기에는 원래 이렇게 물이 마른다고 한다. -_ㅡ;;;

 

0.3㎞ 남았다. 기운내서 가자. ㅠ_ㅠ

 

남강 발원지부터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고, 그냥 돌길 힘겹게 오른 뒤 나무로 짠 계단 팍팍팍 오르면... 정상이다. 드디어 천왕봉, 1915m 정상에 선다.

 

정상에 올랐는데... 응?

 

슬금슬금 밀려오는 구름과 솟아오르는 햇빛이 후광을 만들어주었다.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어 정상 인증도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작품을 남겨야겠다 싶어 냅다 찍었다. 부처가 된 기분이다. ㅋㅋㅋ

 

아침 일찍이라 제법 쌀쌀해서 파카를 입고 올랐는데 몸을 움직이니 더워져 소매를 걷고 지퍼를 열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심해 금방 땀이 식는다. 땀이 식으니 추워진다. 소매를 내리고 지퍼를 올린다. 그래도 춥다. 남는 게 사진이라고, 부지런히 찍어대고 하산 준비를 한다. 원래는 정상에서 이것저것 좀 먹고 내려오려 했는데 추워서 그럴 엄두도 안 난다.

 

그림자 셀프 샷을 찍고...

 

좋아하는 로우 앵글 샷 한 장 찍은 뒤 하산 시작!

 

코스별로 난이도를 표시한 지도인데 중산리-천왕봉 코스와 천왕봉-장터목 코스는 모두 극강의 난이도다. 산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기사가 났는데 국립공원 코스 별로 난이도를 지정한다고 했다. ...... 예상한 바와 같이 내가 다녀온 코스는 최강 난이도에 꼽혔다. ㄷㄷㄷ

 

다시는 안 간다고 하면서도 매 년 한 번은 가게 되는, 신비한 마력의 천왕봉.

 

내려가면서 부지런히 사진 찍어대고 이 사진에는 이런 멘트 써야지, 요 사진에는 요런 멘트 써야지 하는데... 정작 내려와서 블로그에 사진 올리려 하면 만사 귀찮아진다. -_ㅡ;;;

 

여기 뭐라고 하던데 까먹었다. 폐소 공포증이 있는데 이 사진처럼 반대편이 보이는 좁은 길은 그냥저냥 갈만 하다. -ㅅ-

 

열심히 찍기는 하는데 딱히 맘에 드는 사진은 안 걸린다. 그러고보면 지금도 맘에 드는 사진은 다 110만 화소짜리 똑딱이로 찍은 것들이다. -ㅅ-

 

 

 

처음 갔을 때 멋진 운해를 봤던 데크. 초코바 하나 먹으면서 셀카질... -ㅅ-
젊은 처자 둘이 수다 떨다 천왕봉 쪽으로 올라가더라. 그러고보면 젊은 여자들끼리는 지리산처럼 험한 곳도 잘 오는데 젊은 남자끼리 오는 건 보기 힘들다.

 

 

 

똑딱이에 있는 다양한 장면 효과로 찍어 봤다. 잘만 활용하면 멋진 사진 제법 건질 수 있을 거 같은데... 한 장 찍고 모드 바꾸고, 또 찍고 모드 바꾸고 하기가 번거로워. -ㅁ-

 

맘에 드는 곳이라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다시 하산 시작. 여기서 완만한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면 이내 장터목 대피소가 나온다.

 

100명 이상이 잘 수 있는, 로타리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장터목 대피소. 여기까지 올라와서 장사를 했었다니 대단한 선조들이다. ㄷㄷㄷ
대피소 안에서 퀴퀴한 냄새도 나고, 화장실에서는 찌린내 나고, 많은 사람들이 쓰는 곳이다보니 이래저래 좀 지저분하긴 하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까마귀들이 엄청 많았다.

 

어제 먹었어야 할 라면을 이제서야 먹는다. 발열팩으로 라면 먹으려고 부시럭거리고 있자니 지나는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본다. ㅋ
라면은 대피소에서 샀다. 750원인가 붙어 있는데 1,500원 받는다. 두 배. 하지만 바가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 많이 받는 게 당연하다고 납득하기 때문이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밖으로 좀 뿜어져 나오긴 했지만 참치까지 한 통조림 까넣고 초고열량 라면을 기분 좋게 먹었다. 든든하다.

 

라면 먹고 배낭을 다시 꾸려 출발. 이 날 산행의 최대 멍청이 짓이었다.

 

이상하다? 계속 가파른 내리막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 못 보던 길일세?

 

응? 세석 대피소?

 

 

어째 점점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 길이 아닌데... 싶다.

 

그 와중에도 틈나는대로 셀카짓.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ㅋㅋㅋ

 

이 날의 최고 바보 짓, 엉뚱한 길로 간 거였다. 차를 중산리에 세워놨기 때문에 그리로 내려가야 했는데 멍청하게 세석 쪽으로 가버렸다. 중산리로 가려면 식수대 있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천왕봉 반대 쪽에 보이는 길로 냅다 가버린 거다. 한참을 가다보니 미심쩍긴 했는데 설마설마 하며 더 갔고... 결국 세석 대피소를 1㎞도 남기지 않은 지점에서 전화로 길을 물어본 뒤에야 잘못든 걸 알았다.
간 게 너무 아까워서 세석 대피소라도 보고 갈까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날 중산리에서 차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한 시간 반을 갔다가 고스란히 되짚어왔다. 맘이 급해 뛰다시피 가서 돌아갈 때에는 한 시간 걸렸다.

장터목에서 게토레이 네 캔을 사서 물통에 채워 넣은 뒤 급하게 중산리 쪽으로 내려가는데 식수대 있던 분이 어디서 어디로 가기에 그리 급하냐고 하신다. 얘기 들어보니 다른 길 어디에선가 나를 보신 모양이다. 여기서 걷는 걸 봤는데 저기서 또 보이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길을 잘못 들어 이러고 있다 했더니 살짝 웃으신다. 네, 웃으세요. ㅠ_ㅠ

 

발이 너무 뜨거워 중간에 신발과 양말을 벗고 계곡 물에 잠시 발을 넣었다. 물이 어찌나 찬지, 3초를 못 버티겠더라.

 

나이키 퓨얼밴드의 하루 목표는 3,000 FUEL. 내려가는 길을 반도 못 갔는데 이미 4,000을 넘겨 버렸다. 이 날 집에 와서 최종 FUEL을 보니 8,000에 가깝더라. ㄷㄷㄷ

 

같은 곳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 맨 위 사진은 2010년에 찍은 거고, 그 아래에 있는 사진은 이번에 찍은 거다. 2010년에는 같이 간 선배가 빤쓰만 입고 수영을 할 정도로 물이 많았는데 이번에 보니 발목이나 적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태풍 때 굴러온건지 큰 바위가 박혀 있었다.
물이 흘러가는 쪽을 보니 물은 흔적도 없다(맨 아래 사진). ㅠ_ㅠ
내용 추가 : 여기 이름이 유암 폭포란다. 갈수기라 물이 말라서 그렇다고 하네. ㅋ

 

 

 

힘들어서 헐떡거리면서도 깨알 같은 셀프샷 질. 혼자 가서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혼자 가면 좀 으스스하기도 한 길. 오가는 탐방객들이 쌓아놓은 수많은 돌탑.

 

여기저기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일명 넉다운 바위.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 이 바위 위에서 네 명 모두 뻗어 버렸다. 그리고 5분도 안 되어 모두 잠들었다. 한기가 느껴져 깼을 때는 이미 10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어찌나 힘든지 여기서 자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온 몸을 감쌌다. 배도 엄청 고팠고.
그런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이번에는 저 바위에서 까먹을 비상 식량을 넉넉히 준비했다. 통조림도 남겨놨는데 꺼내기 귀찮아서 결국 초코 바만 먹었다.

 

2010년에는 너무 힘들어서 사진 찍을 힘도 없었기에 내려가면서 찍은 사진이 거의 없었지만 올 해에는 나름 각오도 단단히 하고 준비도 꽤 했기에 내려가면서 그냥저냥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맘이 급해져서 서둘러 내려오느라 몇 번 삐끗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내년부터는 스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막상 손에 들면 번거로울 것 같지만...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다. 내려오면서 칼바위까지 남은 거리를 보며 다 왔네, 얼마 안 남았네, 주절주절거리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뻗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칼바위를 목전에 둔 공터(중산리 가는 길과 장터목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신발 벗고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 칼바위는 그냥 지나쳤고, 이윽고 중산리 탐방소가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냈다는 생각에 굉장히 기뻤다.

모아온 쓰레기로 그린 포인트 적립을 하고, 슈퍼에 들러 음료수 한 통을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장터목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비 피우면서 이제 담배 안 피우겠다 다짐했기에 사지 않았다.

차로 가서 무거운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배낭을 차에 싣고 땀에 절은 티셔츠를 갈아 입은 뒤 출발. 빨치산 어쩌고 하는 전시관을 보고 오려다가 포기했다. 너무 힘들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에 좀 밟았는데... 카메라에 찍혀 버렸다. 경찰도 없었고, 단속 구역 표지판도 없었는데 아무도 없는 커브 길 끝에 카메라만 덜렁. 설마 했는데 2주 뒤에 집으로 범칙금 내라고 쪼가리 날아왔다. 열 여덟!

 

산에 다녀오자마자 써야 여러가지로 생동감이 있는 글이 될 터인데 너무 힘들다보니 그렇지 못했다. 미루고 미루다 쓰는 건데 이미 그 때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내가 봐도 글이 엉망이다. 내년부터는 손전화에 바로바로 쓰던가 엠피삼 플레이어로 녹음하면서 올까 싶다.

아무튼... 올 해에도 무사히 지리산 다녀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나라도 가서 연속 기록 깨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년에 또 보자, 지리산.

 

 

 

안드로이드 국립공원 어플이다. 전문 산악 지도 어플을 굳이 돈 주고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이 녀석을 활용했는데 한참을 가도 이동거리가 제로다. 거기다 정상적인 탐방로로 가는데도 탐방로를 벗어났다며 꾸엑~ 꾸엑~ 하는 경고음을 낸다. 그 뿐이랴, 자꾸 툭툭 꺼진다. 배터리는 엄청나게 잡아먹으면서. -ㅅ-

 

안드로이드 속도계 어플이다. 고도와 지리 좌표도 나오고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위 사진이 로타리 대피소에서 찍은 거, 아래 사진은 천왕봉 바로 밑 공터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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