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조) 성
차를 타고 가면서 마사미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한국어가 유창해서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부러웠다. 한국 돌아가면 일본어 공부 진짜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시는데 짐이 뭐냐고 들어서... 아, 짐은 호텔에 맡겨 놨습니다 했다가... 아... 취미... 하고 배드민턴 치는 거 좋아한댔더니... 자기도 40년 쳤단다!!!
좀 멀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괜히 간다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멀었다. 아... 이래서 다녀온 사람 후기 찾아봐도 없었고나... 사람들이 안 가는 이유가 있고나... 마사미 아주머니가 기노 성을 어찌 알고 가려하느냐고 놀란 이유가 있고나... 한참 간 거 같은데 4,000m 남았다고 나오니 안 놀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에어컨 켜고 가니 힘이 딸려 결국 꺼야 할 정도의 산길이었다. 맞은 편에서 차 오면 아슬아슬하게 비켜가야 하는 좁은 길이었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넓고 넓은 주차장에 차라고는 달랑 두 대. -ㅅ-
차를 세우고 마사미 아주머니와 그제서야 통성명을 했다. 스마트 폰을 썼다면 라인 아이디 주고 받아 친구 등록하고 일본어 번역 봇 초대한 대화방에서 수다 떨면 될텐데, 마사미 아주머니는 스마트 폰을 쓰고 있지 않았다(일본은 우리보다 일반 휴대 전화 사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음). 그래서 메일 주소를 받고... 8월에 한국 온다고 하셔서 꼭 연락 달라고 했다. 마침 당고(찹쌀떡 생각하면 되겠음)가 있다며 먹을 것까지 챙겨줘서 감동, 또 감동. 택시도 잘 오지 않는 곳인데 어떻게 기차 역까지 돌아갈 거냐고 계속 걱정해줘서 잘 걸으니까 괜찮다며 안심을 시켜드리고 작별했다.
아... 이렇게 또 좋은 인연을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기뻤다.
마사미 아주머니와 헤어진 뒤 휑한 주차장을 찍고,
주차장에서 기노 성 가는 길도 찍어 본다.
그럭저럭 걸을만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팡이로 쓰라고 둔 듯 하다. 왜 저렇게 해놨나 진작에 고민해봤어야 했다. -ㅅ-
일본 사람들 대단하다 싶은 게... 저 산길을... 휠체어 타고도 오를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로 이리저리 돌려놨다. 휠체어 타고 올 정도로 엄청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도 관람에 지장이 없도록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었다. 후천적 장애인이 훨씬 많다는데, 자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면서 장애인을 비정상인과 같은 의미로 쓰는 우리나라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점 아닌가 싶다.
고즈넉한 숲길을 천천히 걷다보니
저 멀리 뭔 건물이 보인다.
기노 성은 먼저 쓴 기비쓰 신사 글에서 언급한 모모타로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모모타로에게 화살을 맞은 뒤 목이 잘려 죽은 우라가 살던 곳이 기노 성이다. 실제로 백제의 피난 왕가가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열두 개의 백제식 성을 지었다고 나오는데 기노 성이 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축성 시기를 알 수 없고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성이다. 다만 축성 양식이 기존 일본식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 때문에 백제인들이 어떻게든 관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아무튼... 발굴 작업도 지지부진하고 희귀 식물이 근처에 있어 자연 보호 단체에서 발굴을 반대하는 등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은, 미지의 성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어 안내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저게 전부다. 더 이상 볼 게 없다. 일본의 100대 성에 기노 성이 포함되는데 대체 선정 기준이 뭔지 묻고 싶어졌다.
아주 일부만 남은 성벽 부분을 보고 나서 계속 앞으로 걸었다. 뒤돌아서 한 컷 찍고.
길 따라 걷다보니 수문이라는 게 나오는데 0 수문부터 1 수문, 2 수문,... 차례로 나온다. 그리고 수문이 있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수문을 알리는 사진 속 표지판과 흐르는 물 뿐. 뭔가 허무했다. 이게 전부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 되돌아갈까 말까 고민했다. 달랑 이거 보려고 한참을 차 타고 왔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 일단은 계속 전진.
경사가 아찔해서 까딱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죽겠고나 싶었다.
그래도 산 위에서 내려보는 오카야마 지역은 제법 평화롭고 아늑해보였다.
돌에 새겨진 부처님 앞에는 저렇게 동전들이 잔뜩. 대부분 1엔 짜리였다.
현 위치. 이걸 보니 막막해졌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기분이었다. 남한산성은 뒷짐 지고 걸어도 될 정도로 만만한 곳인데 성곽을 따라 한 바퀴 크게 도는 건 은근히 힘들다. 거리도 제법 되는데다 오르고 내리는 게 반복되다 보니 체력을 꽤 잡아먹는다. 남한산성 만만하게 보고 한 바퀴 돌다가 죽겠다고 징징거렸던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도저히 한 바퀴 다 도는 건 무리다 싶어서... 또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포기했다. 마침 빠지는 길이 딱 나왔다.
얼씨구나~ 하고 내려가는데... 하아~ -ㅁ- 평범한 동네 산이 아니다. 지리산급 난이도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장터목 대피소에서 중산리 내려가는 정도의 난이도다. 그 와중에 빨리 내려가고 싶어 산악 구보하다시피 뛰어 내려왔다(결국 이것 때문에 여행 내내 왼쪽 무릎에 통증을 달고 다녔음). 에어 조던 21 신고 있었는데 처음 샀던 에어 조던 21은 지리산 갈 때 뭣도 모르고 신고 가서 걸레가 됐던 적이 있다. 일본 여행에 신은 건 소장하려고 가지고 있던 두 번째 에어 조던 21이었는데, 대체 산이랑 뭔 인연이기에 이 신발만 신으면 산 타는가 싶더라. ㅠ_ㅠ
한참을 걸어 평지에 이르렀다. 연쇄 살인의 배경이 되어도 무방할 것 같은, 사람 한 명 이용할 것 같지 않은 화장실에 들러 몰골이 어떤지 확인을 했다. 일단은 사람 같았다. 손만 대충 씻고 나왔다. 사람이 거의 들지 않는 화장실일텐데 무척이나 깨끗해서 일본답다는 생각을 했다. 구글 지도를 켜고 보니 가장 가까운 핫토리 역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한다.
작은 시골 마을을 걷고 또 걷는다.
일본은 여기저기에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공동 묘지 같은 게 많은데 산 이 쪽에서 보고 음~ 있구나~ 하고 말았는데... 지나와서 돌아보니... 산 전체가... ㄷㄷㄷ
일본이 무척이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내 옛날을 떠올리게 해서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주택에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2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인데 아직 주소도 기억한다. 경상북도 포항시 인덕동 E-187호. -ㅅ-
당시 우리 집은 엄청나게 큰 마루가 있었고 작지만 마당도 있었다. 그 마당에 사과 나무랑 포도 나무도 있었고. 지금 보면 얼마 안 되는 자그마한 마루였겠지만 아무튼 내 기억 속에는 축구장 버금가는 큰 공간이었다. 야트막한 담벼락도 있었고, 그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로 난 골목길을 수도 없이 뛰어다니며 놀았다. 일본처럼 2층 집은 아니었지만 사방이 아파트인 우리나라에서 벗어나 일본의 집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릴 때 살던 집을 떠올리게 된다. 골목길, 담벼락, 마루,... 이런 것 때문에 일본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구글 지도 보다보면 정말 대단하다 싶은 게... 넓찍한 포장 도로 뿐만 아니라 비포장 시골 길로도 안내하고 보이지도 않는 골목 길로도 안내한다. 구글이라면 지구 정복도 문제 없을 것 같다.
응? 박철민 아저씨!!! ㅋㅋㅋ
흔히 낑깡이라고 하는, 금귤=금감이 낮은 담벼락 너머에 열려 있었다.
한 때 물이 요란하게 흘렀을 곳이겠지만 가문 지 오래라서 숲을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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