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경로 - 실제 경로
하코네 여행은 사실 상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갈만한 곳도 알아보고 동선도 정리해야지, 해야지, 그래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떠난 거. 그래서 하코네로 향하는 로망스 카 안에서 어디를 가야할 지 대충 지도를 봤다. 딱히 어디를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일단 하코네의 모든 교통 수단을 다 이용할 수 있는 프리 패스가 있으니 등산 전철, 케이블 카, 로프웨이, 해적선을 모두 타보자고 생각했다. 교통 수단 체험 여행이 될지도... ㅋ
하코네 등산 전철은 등산 전차, 등산 열차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어 표기대로라면 등산 전차가 맞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전차(電車 = でんしゃ)를 보통 전철로 번역하고 있으니 저도 전철로 쓰겠습니다. 전차라고 하면 '전기로 가는 차'보다는 '전투용 차량(戰車)'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참고로 전투용 차량, 흔히 Tank라 부르는 건 일본어로 せんしゃ라 합니다.
다시 하코네유모토 역 안으로 들어와 개찰구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타고온 로망스 카 맞은 편 플랫폼에 등산 전철이 멈춰 있었고 그걸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잠시 후 전철 문이 열리자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 억지로 탄다면 출근 시간의 신도림에서 2호선 타듯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 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음 전철을 기다리기로 했다. 맨 앞에 서 있으니 확실히 앉아 갈 수 있겠지. ㅋ
전철이 도심지처럼 몇 분에 한 대, 이런 식으로 자주 오는 건 아니라서 약간 기다리긴 했지만 이내 텅 빈 전철이 도착했다.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배가 맞은 편에 앉기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못 앉을 거라 했더니 바로 내 쪽으로 옮겨 왔다. 비어 있던 우리 앞 자리는 선남선녀 일본인 커플이 차지. 별 생각없이 앉았는데... 역좌석이다. 진행 방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꼬랑지 쪽을 바라보고 앉아버렸다. 멀미 난다는 사람도 있지만 KTX에서 경험해 본 바로는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
열차가 출발했다. 오르막을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라니 까마득한 높이에 설치된 철교를 지나간다. 여기가 '데야마의 철교'라는 곳인가?
말 그대로 등산하는 전철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부지런히 올라간다. 산을 올르기 때문에 지그재그 방식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아라시야마의 린덴 탔을 때의 기분도 나고. 사카이미나토 가는 길에 있던 작고 조용한 역 같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분위기다.
얼마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도쿄만 해도 눈 보기 힘든 지역이라 이례적인 폭설이라고 보도되었다고 한다.
전철은 한 쪽 방향으로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진행 방향을 바꿔서 간다. 어느 지점에 딱 멈추는데 앞이 시멘트 블럭으로 막혀 있는 거다. 그러면 앞 쪽에 있던 기관사가 내려 반대 쪽 운전실로 향한다. 거기 있던 사람이 뒤로 오고. 그리고는 진행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진행하는 거다. 그러면 왔던 길 그냥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철로가 찰카닥~ 하고 바뀌어 노선을 바꿔준다. 그렇게 가니 어느 틈엔가 정방향이 되어 있다. 나중에 또 역방향으로 바뀌었고. 안내에 따르면 세 번에 걸쳐 진행 방향을 바꾼다고 하니 등산 전철에서는 정방향, 역방향, 크게 개의치 말고 앉으면 되겠다.
겨울이라 굉장한 풍경이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벚꽃이 만발할 때 찾아온다면 정말 엄청난 경치를 자랑할 것 같더라.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는데 실제로 그랬던 것 같다. 중간에 선배가 발딱 일어나더니 앞 쪽을 향해 손짓을 해서 왜 저러나 했더니... 일본 할머니한테 자리를 양보하는 거였다.
바로 앞에 할아버지도 한 분 계시기에 그럼 할아버지도 모시고 오라 했더니 무시. 역시 젊고 늙고를 떠나서 여자에게만 친절한 선배. ㅋㅋㅋ 할머니는 잠시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렸다. 예전에 일본의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했더니 한사코 앉지 않아서 뻘쭘했던 적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걸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자리 양보도 안 받으려 하는고나' 라 생각해서 그 뒤로는 빈 자리 없을 때 노인들이 보여도 양보를 안 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 앞으로는 거절 당하더라도 한 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시라고 권해야겠다.
그렇게 고라 역에 도착했다. 고라 역 바로 전에 조코쿠노모리 역에 내려 “조각의 숲 미술관”을 보러 갈까 망설였지만 하코네 지역은 해 지고 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일단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만에 하나라도 도겐다이 갔는데 해적선 운항 시간이 끝나 배에 탈 수 없다고 한다면 버스를 이용해서 숙소까지 가야 한다. 코스도 꽤 되는데다 어떤 버스를 타야하는지도 확실히 몰라서 조금 쫄기도 했다.
'어쩌면 눈이 맞아 결혼할지도?' 라는 환상을 품고 아이돌을 빨아대는, 사춘기 진입 초기의 수줍은 여중생처럼 한없이 민감한 선배의 소화 기관은 먹은 것도 없는데 맡은 바 소임을 지나치게 열심히 해서 시도 때도 없이 결과물을 뱉어내고자 했다.
아... 먹은 게 아예 없지는 않고나. 신주쿠 역에서 몇 젓가락 뜨지 않았던 규동이랑 로망스 카 안에서 먹은 장어 덮밥. 아, 참고로 장어 덮밥에 대한 선배의 평은 '짜고 달지만 먹을 만은 하다'였다. 저 정도 평이라면 보통 사람의 '내가 살려고 먹었다'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식사를 조금 빨리 하지 않으면 또 눈이 풀릴지 모른다.
선배가 화장실에 간 동안 동네를 찍어 봤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 치고는 한적한 분위기다.
Touristification. 투어(Tour)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로, 관광객들이 주거 지역을 찾아와 발생하는 소음과 쓰레기, 주차 문제 등을 이유로 거주민들이 이주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촌 한옥마을과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이 대표적이고 외국에도 페루의 마추픽추나 그리스의 산토리니 같은 사례가 허다하다. 하코네는 일본 현지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찾는 관광지인데 거주 지역 쪽은 조용한 분위기였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뭐, 그냥 슥~ 본 거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거주하고 있는 분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국민성과 함부로 주차했다가는 엄청난 벌금을 맞는 법규 등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는 확실히 덜한 분위기인 건 사실이다. 외국인 관광객은 중국인이 압도적이었는데 중국인답게 떼로 다니며 엄청 떠들긴 했지만 아무데나 가래 침을 뱉는다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코네 로프웨이. 선배는 고소 공포증이 있다며 내켜하지 않았지만... 정작 타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ㅅ-
제법 가파른 오르막의 하코네 등산 케이블 카. 고라 역에서 소운잔 역까지 운행한다. 줌으로 당겨 찍어서 누군가의 뒤통수가 찍혔다.
캐리어 운반 서비스가 없었다면 이 등산 케이블 카를 타고 있다가 나카고라 역에서 내려 숙소에 들렀다가 다음 일정을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 ¥1,000도 안 되는 돈으로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됐다. 하코네유모토 역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그 사람들이 고스란히 고라 역으로 왔기 때문에 역시나 바글바글.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어찌나 떠드는지 귀가 아플 지경이다. 뭐, 일본인 관광객들도 왁자지껄한 분위기였으니 딱히 중국인들 매너 운운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관광지에서의 들뜬 분위기 정도?
기다렸다가 케이블 카를 타고 소운잔 역에서 내렸다. 이제 소운잔에서 로프웨이를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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