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병가는 1일부터 15일까지. '새해 첫 날부터 어디 돌아다니는 거 아니'라고 배운 사람인지라 첫 날은 집에서 빈둥거리며 보냈고, 2일은 순창에, 3일은 단양에서 보냈다. 4일에 집에 돌아와, 오늘이 12일. 열흘 가까이 뭘 하며 보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속 누워 있었던 것 같다. 욕창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아, 서울에 다녀오긴 했다. 8일에 올라가서 9일에 내려왔다. 확실히 영감化 진행 중인지라 고작 1박 2일 움직인 것만으로 완전히 방전되어버렸다. 완충까지는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극악의 에너지 효율. 손전화 배터리처럼 새 걸로 갈아 끼울 수 있음 좋겠다.
21시를 살짝 넘기면 자려고 눕는다. 새벽에 깨면 '어차피 출근 안 하는데, 뭐~'라는 생각으로 태블릿이나 손전화를 붙잡고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잠이 든다. 그러다가 여덟 시, 아홉 시가 되면 밥을 먹고, 먹자마자 눕는다.
누워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한 시간 남짓 자다가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는다. 유튜브에서 새로 고침을 수십 번 하고, 그러다 또 눕고, 그러다 또 자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집 밖을 안 나간다.
오늘은 며칠 전에 산 파인애플을 먹어 치우기 위해 맥주를 사러 밖에 나갔다 왔다. 며칠 째 집 밖을 안 나가서 그런지 코 앞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오는 게 어색하다. 겸사겸사 쓰레기를 버린 뒤 맥주 네 캔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질된 파인애플 1㎏인데 한 번에 다 먹으면 입 안이 쓰리더라고. 그래서 반만 먹고 생 라면으로 안주를 바꿨다. 그 때, 회사 동료에게 연락 왔냐고 카톡이 왔다.
심장이 덜컥! 했다. 뒤로 밀릴 것 같다더니 발표가 난 모양이고나.
지난 12월에 근무지를 옮기겠다고 신청했더랬다. 1월 두번째 주에 발표가 난다고 했는데 세번째 주로 밀릴 거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아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발표가 난 모양이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전에 있던 ㅇㅇ이고, ㅇㅇ에 갈 수 없다면 ㅅㄴ이라도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계속 남는 게 최악이고. 만약 ㅇㅇ에 가게 된다면 같이 일했던 동료들로부터 연락이 올텐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니 ㅇㅇ은 물건너 간 모양이다.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쩐지 맥주 네 캔을 다 먹어 가는데 취기가 안 오르더라니... 오늘은 미친 듯 마셔야 할 모양이고나.
집주인한테는 늦어도 2월 중에 이사를 간다고 이미 떠들어 놨으니 여기에서 계속 일하게 되더라도 이사는 가야 한다. 다른 집을 알아봐야겠고나. 제기랄...
계속 여기에서 일하게 된다면 염병할 AH 77I 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틀림없이 망가질 거다. 도망갈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내 멘탈은 엉덩이로 짓누른 엄마손 파이처럼 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휴직이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휴직은 자기 개발 휴직. 최대 1년 짜리다. 문제는, 1년 동안 수입이 전혀 없게 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살아야 한다. 은행 빚만 잔뜩인데 생활이 될 리가 없다. 이를 어쩌나... 심각한 상태인데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든다. 그냥 이대로 녹아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때. 아까의 동료에게 카톡이 왔다. ㅇㅇ이란다. 어? 어어? 에?
진짜인가? 설마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ㅇㅇ으로 났다면 ㅇㅇ의 동료들에게 연락이 왔을텐데? 그렇게 긴가민가 하고 있는데 예전에 ㅇㅇ에서 같이 생활했던 동료에게 축하 전화가 왔다. 내가 얼마나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더라. 그렇게 ㅇㅇ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와 통화를 하고 나니 조금 실감이 났다.
아... 가는고나. 드디어 가는고나. ㅽ 이 염병할 동네에서 드디어 탈출이고나. 크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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