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40대 아저씨가 준비없이 빡쌘 산에 올랐다가 죽겠다고 징징대는 이야기!
원래는 지리산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당일치기로.
다섯 시에 일어나 산청에 있는 중산리 탐방 안내소까지 두 시간 남짓. 일곱 시 반부터 오르기 시작해서 로타리 대피소를 찍고 천왕봉에 도착하기까지 네 시간. 정오 쯤 내려오기 시작해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면 15시. 집으로 돌아오면 17시. 물론 계획대로 되지는 않을테니까 조금씩 늦어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막상 가려 하니 너무 귀찮았다.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것도 맘에 안 들었고. 그렇다고 방구석을 굴러다니다 하루를 보내버리면 허무하게 하루를 날렸다는 생각에 후회를 할 게 분명하니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네일베 지도를 켜서 근처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봤다. 우포 늪에 가본 적이 없어 거기를 갈까 하다가 갑자기, 말 그대로 갑. 자. 기. 눈에 들어온 가야산.
https://www.knps.or.kr/front/portal/visit/visitCourseMain.do?parkId=120700&menuNo=702008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4635&cid=46617&categoryId=46617
검색을 해봤더니 동네 뒷 산 수준은 아닌 듯 하다(국립 공원인데 이 따위 망발을... 😑). 제법 힘들다는데, 가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 산에서 먹는 김밥과 라면의 기똥참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 준비를 할까 했는데, 그 기똥참을 즐기려면 뜨거운 물을 비롯해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잠시 고민하다가 비빔면이 낫겠다 싶어 잽싸게 면만 끓인 뒤 찬 물에 식혀 락앤락 통에 담았다. 산 정상에서 왼 손으로 비비고 오른 손으로 비벼 먹는 비빔면은... 크으~
음료수를 사러 집 근처 편의점에 갔다가 소시지가 보여서 집어들었다. 천×장사 소시지가 한 개에 2,000원? 응? 얼마? 2+1이라 세 개 집어들긴 했는데, 제 값 주고 산다면 소시지 세 개에 밥 한 끼잖아? 😱 물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월급은 1%도 안 올랐는데. 제기랄. 아무튼. 육포도 2+1이라 세 개 사고, 음료수는 두 개를 샀다.
음료수 둘, 소시지 셋, 육포 셋, 청포도 맛 젤리 둘, 비스킷 하나를 먹을 것으로 챙겼고, 등산 스틱과 물티슈를 가방에 넣은 후 출발했다. 평일 낮 시간이라 차는 전혀 막히지 않았고 크루즈 기능 덕분에 평온하게 달려 가야산 백운동 주차장에 도착.
위 사진을 찍은 뒤 입구에 있는 쉼터에서 스틱을 조립하고 있자니 탐방 안내소에서 참하게 생긴 처자가 나와 만물상 코스로 올라갈 거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니까 예약을 해야 한단다. 응? 등산하는 데 예약을 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나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온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태블릿으로 예약해주기도 하더라. 이름과 전화 번호를 알려주면 탐방 안내소의 직원이 바로 처리해준다. 카카오톡으로 바로 메시지가 왔다. (예약일자는 7월 1일로 왔는데 탐방일시는 8월 1일로 왔다. 나 다음 달 1일에 또 가야 되는 건가? 😱)
처음 1㎞가 힘드니까 천천히 올라가라는 주의를 들은 뒤 등산로에 진입했다.
출발 전에 배를 채우겠답시고 김치 사발면 + 즉석 밥으로 식사를 했는데 짠 걸 먹은 탓이었는지, 아니면 험한 코스 때문에 출발하자마자 땀이 비오듯 쏟아진 때문인지, 목이 너무 말랐다. 딱 반만 마시겠다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꿀떡꿀떡꿀떡.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500㎖인 줄 알았는데 620㎖라서 다행이었다. 500㎖ 짜리였다면 정상을 못 밟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출발하자마자 내려오는 사람을 본 것 말고는 아~ 무도 못 봤다. 손전화로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팔에서 땀이 방울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출발할 때 봤던 사람은 하산 길로 만물상 코스를 선택했다는 건데, 올라갈 때에는 용기골 코스를 이용했던 걸까? 설마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모두 만물상 코스를 이용한 거라면... 진정한 용자다.
힘들어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저 와~ 소리 밖에 안 나왔다. 여기를 봐도 와~ 저기를 봐도 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빨간 코스가 다섯인데 중산리 → 로타리 → 천왕봉, 중산리 → 장터목 → 천왕봉, 이 두 코스가 모두 빨간 색이다. 우리나라에 다섯 개 뿐인 빨간 코스 중 두 개가 지리산, 그 것도 내가 항상 이용하는 코스였던 거다. 여러 번 갔기 때문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좀 덜 힘들게 느껴지긴 하는데,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는 빨강을 넘어 검정. 그냥 어려움이 아니라 매우 어려움. ㄷㄷㄷ
컨디션이라도 좋으면 모르겠는데 잠은 네 시간도 채 못 잤지, 목이 엄청 마른데 마시고 싶은대로 마셨다가는 후반부에 큰 일 나겠다 싶어 아끼고 있는지라 갈증 때문에 힘들지, 이래저래 불편한 상황에서 상당히 빡쌘 길이 계속 이어지니 조만간 조상님 뵙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 갔었는데 그 때에는 푹 파인 가운데 부분으로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놨다. 석굴암도 예~ 전에는 보호 유리 같은 게 없어서 그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근처도 못 가게 막아놨다. 보호와 보존도 좋지만 그 때문에 가까이서 보거나 만지는 게 불가능해지니 아쉽기도 하다. 보기만 하라는 걸 만져대서 손상이 가니 접근을 막는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 바위는 위험하니까 올라가지 말라고 막았을 게다. 사진 찍겠답시고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있었을테지.
칠불봉/상왕봉까지 다녀오려면 왕복 2.8㎞를 걸어야 한다. 마실 거리라도 넉넉하면 힘들어도 고민하지 않고 그냥 갈텐데, 너무 목이 말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용기골 코스로 내려갈까?' 잠시 고민했다. 나중에 다시 오면 되잖아? 하지만...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정상까지 다녀오자고 마음 먹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결국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서성재에서 발길을 돌려 내려갈까를 두고 망설이다가 출발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상태였다.
정상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땀을 식혔다. 하지만 맘 편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이, 좁쌀보다도 작은 날벌레가 쉴 틈 없이 달려들었다. 산에서는 눈에 띄는 색깔의 옷을 입는 게 좋다고 해서 형광색 티셔츠를 입었는데 그 때문인지 벌레가 엄청나게 달라붙었다.
마지막 남아있던 음료를 다 마셔 버렸고,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아서 기껏 싸들고 간 비빔면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1도 들지 않았다.
올라갈 무렵에는 여섯 명 정도가 더 있었는데 다들 나보다 먼저 도착했던지라 하산도 빨랐다. 혼자 정상에서 시간을 적당히 보낸 후 서성재로 되돌아갔다.
서성재에서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은 뒤 마그네슘 스프레이를 뿌렸다.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 준비. 쉬는 것보다 뭔가를 마시는 게 더 간절했다.
뛰다시피 내려왔기 때문에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참을 뛰어내려오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계곡 물에 세수를 하고 팔에 물을 끼얹어 땀을 식혔다. 그리고 나서 다시 뜀걸음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내게는 마실 것을 파는 슈퍼가 간절할 뿐이었다.
출발 전 스틱을 조립했던 곳에서 스틱을 접어 넣었다. 물 티슈로 흙을 닦아내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마르니까, 뭔가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까, 만사 귀찮았다.
대충 정리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 식당 겸 슈퍼가 몇 군데 있었지만 장사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맨 처음 보였던 슈퍼에 사람이 있긴 했지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울 것 같다는 뇌피셜 때문에 건너 뛰었고 그 다음에 나온 슈퍼들은 죄다 사람이 아예 안 보였다.
결국 주차장까지 가버렸고, 그냥 빨리 내려가서 편의점에 가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은 뒤 티셔츠를 갈아 입었다. 바지와 속옷까지 다 젖어서 갈아입을 바지도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될 줄 몰랐던지라 준비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출발.
한참동안 가게가 나오지 않아 맘을 졸였지만 산을 내려가 자그마한 마을로 접어드니 CU 편의점이 보였다. 초딩들이 점령한 편의점에서 포카리 스웨트 1.5ℓ 하나와 얼음 아이스크림을 샀다. 6,100원. 응? 얼마?
차에 올라 숨도 안 쉬고 꿀떡꿀떡 음료수를 마셔댔다. 갑자기 차 안에서 들리던 노래가 크게 들리더라. 물이 들어가 살겠다 싶으니 신체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1.5ℓ 패트 병에 탁한 색으로 채워져 있던 음료의 ⅔가 사라져 있었다.
남은 음료수를 아이스크림 통에 부어 와그작 와그작 얼음을 씹어 먹으며 고속도로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운전해서 집에 도착. 짐을 풀어 헤치니 가방 맨 아래에서 아침에 준비했던 비빔면이 나왔다. 먹지도 않을 걸 괜히 들고 가서는. 젠장.
혹시 상했나 싶어 냄새를 맡아보니 상한 것 같지는 않다. 액상 스프를 뿌려 대충 비빈 뒤 뱃 속으로 때려 넣었다. 나와 함께 가야산에 올라갔다 온 비빔면은 그렇게 뱃 속으로 사라졌다. 샤워하고 나와 짐 정리를 마치고 빨래하는 걸로 하루를 마무리.
자고 일어나 체중계에 올라가봤다. '잔뜩 고생했으니 2㎏ 정도는 빠지지 않았을까?'라 생각했는데, 1g도 빠지지 않았다. 뭐야, 이게! 게다가 등산의 여파로 발목과 무릎에 통증이 느껴진다. 오늘 운동은 쉬어야겠다. 태풍 올라온다는데, 장마 때문에 비 오고 그러면 운동 못 갈텐데...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까 운동은 건너 뛴다. 마사지 건 충전하는 중이다. 😩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다. 양 쪽 종아리에 엄~ 청난 통증이 느껴진다. 마사지 건을 갖다 댈 수조차 없다. 가만히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순간 입에서 윽! 소리가 절로 난다. 걸을 때마다 아! 아아! 아아아~ 😭
등산을 즐겨 어지간한 산에는 다 가봤다는 회사 선배에게 얘기했더니 한 여름 등산 + 목마름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졌을 거란다. 그런가? 진짜 힘들었는데. 아무튼, 당분간은 신라가 가야 왕족 핍박했다는 글을 봐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가야산은... 질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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