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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미 』/『 BOOK 』

일본의 굴레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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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을 처음 간 게 2014년. 첫 해외 여행인데다 일본어는 1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패키지로 가는 게 그나마 안전했을텐데 포항과 세레소 오사카의 ACL 경기를 보고자 했기 때문에 자유 여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 북을 여러 권 빌려 보며 꼼꼼하게 계획을 짠 덕분인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大韓民國 海兵隊(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쓰여진 바지를 입고 오사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확실히 무식하면 용감하고나 싶다.

 

 

 

30년 넘게 읽고 쓰고 말해온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의 경험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게끔 하는 것들이 넘치고 넘쳐 일본이라는 나라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후 매 년 일본에 갔다. 1년에 두 번 다녀온 적도 있고. 덕분에 회사에서는 일본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어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자문을 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작 나는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라. 딱 한 달만, 한 달만 일본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 묶인 몸인지라 한 달이나 휴가를 내고 일본에서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모든 에너지가 다 타버리고 나서야 자포자기하듯 휴직을 하고 일본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2년을 예정하고 갔지만 거지 발싸개 같은 업무 능력의 인사 담당자 때문에 6개월 일찍 돌아왔다.

 

 

 

그렇잖아도 일본으로 자주 여행을 간다는 이유로 일본통이라 인식되었었는데, 유학까지 다녀오니 더더욱 일본 전문가처럼 대하더라. 내가 뭘 안다고.

심심하면 스윽~ 와서는 일본은 왜 그렇게 깨끗하냐, 걔들은 왜 자민당 밖에 안 찍냐,...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나름대로 대답을 해줘도 본인들이 원하는 답변이 있으니까, 그 애국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우리도 전라도에서는 민주당만 뽑아대고 대구/경북은 매국 꼴통당만 뽑아대고 있는데 자민당만 뽑는 게 신기하냐?'고 되물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쪽바리 원숭이 AH 77I 들은 ㅄ이라 그래요.'라는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는 눈치도 보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650쪽이 넘는 책을 읽으라고 한들 읽을 턱이 없지. 일본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이 책은 일본에 적잖은 관심이 있는 이들이, 적어도 『 국화와 칼 』 정도는 자신의 의지로 읽었던 사람들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책 되시겠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지만 『 만들어진 신 』 이후로 줄 그어가며 집중해서 읽었다. 최근에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을 읽으면서도 줄을 그어댔는데 공감할 수 없었던 부분도 꽤 됐던지라 만족도는 조금 떨어졌더랬다. 그런데 이 책, 『 일본의 굴레 』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절히 공감하며 읽었다.

 


 

글항아리에서 나온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알게 되어 도서관에서 빌려 왔는데 서문을 읽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 이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책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산 책 중 가장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일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다고 했는데 사실은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찌될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는 책이다. 책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36년 동안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일본의 영향을 정말 크게 받았고, 그 잔재가 지금도 잔뜩 남아있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배를 타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어이고, 최근에는 많이 순화되었지만 당구 같은 스포츠 쪽에서도 일본어가 굉장히 많이 사용됐다. 현대화되면서 없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비롯된 물건들도 수두룩하고.

최근 여기저기 생기고 있는 추억팔이 장소, 7080 어쩌고 하는 곳에 가보면 내쇼날 선풍기를 비롯한 일본의 가전 제품으로 구색 맞춤 해놓은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고 풍로나 커다란 보온병 역시 일본으로부터 건너왔던 물건들이다. 내가 어릴 때 집에서 흔히 보던 제품들, 이제는 박물관 같은 곳에 가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인데 일본에서는 여전히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신기하더라.

국민학교 때 살던 집은 나무로 된 마루가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중학교 입학 전에 아파트로 이사간 후 마루가 있는 집을 본 적이 없는데 일본에 가니 나무로 된 마루를 어렵잖게 볼 수 있더라. 한국에서 낡은 것에 대한 대접이 형편없는 데 비해 일본은 오래된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며 꾸준히 지켜가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어릴 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일본을 부지런히 들락날락거렸는데 그러다보니 궁금한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건 왜 이렇지? 저건 왜 그럴까?

 

이 책에는 일본에서 40년 이상 살았던 미국인의 진지한 고찰이 담겨 있다. 절묘하게 분석해놓은 내용을 읽다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더라.

 


 

일본에 가보면 자신들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끼친 해악을 까맣게 잊은 채 핵폭탄 두 발 맞은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저자인 태가트 머피는 서문에서부터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 (이유는 책에서 직접 찾아보시길.)

그 깊이있는 분석은 『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 따위이 비할 바가 못된다. 저 못 배운 것들이 왜 독도를 자꾸 자기 땅이라 우기는 건지, 눈 파랗고 머리 노란 것들한테는 설설 기면서 동남아 or 흑인들에게 왜 그렇게 거들먹거리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좀 더 어른스럽게 대응할 수 있을 게다. 상당수가 알게 모르게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고.

 

 

숫자와 통계 놀음이 아닌지라 꽤 두꺼운 책이지만 술술 읽히는 편이다.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냥 뛰어 넘어도 된다. 일본과 관련된 책을 볼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 때문에 어려워 하던데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인의 이름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머리 속에 남기지 않아도 된다. 너무 헷갈린다면 종이에 계보를 그려가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형광펜 색을 바꿔 다시 한 번 읽고 있다. 이제 누군가가 일본에 대해 물어보면 저 책 읽어보면 된다고 뒤집어 씌울 생각이다. 추천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읽을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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