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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일기 』

2024년 04월 23일 화요일 흐림 (꿈에 나온 아버지)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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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에 갇혀 이래저래 힘들게 지내다가, 두 달만에 육지를 밟는 건데 집에 가면 좋은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가 항상 술을 마시고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더는 안 되겠다, 아버지와 연을 끊어야 내가 살겠다라고 생각한 건, 가게 앞에 주차했다는 이유로 남의 차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서 박살을 냈을 때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외제 차가 아니었고 새 차도 아니었기에 수리비와 피해 보상으로 50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그게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서 나갔다.

시간이 흐른들 아버지는 달라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역해서 뭐라도 하기 위해서 더 이상 구멍난 독에 피 같은 월급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연을 끊었고, 10년 넘게 남으로 지내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연락을 받아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아버지와 연을 끊었다고 하자 주위에서 다들 돌아가시면 후회한다고 했는데, 알면서도 남으로 살았다.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했지만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남으로 살기를 선택할 것 같았다.

 

세상 쓰잘데기 없는 놈이 부모 죽은 뒤 효도하는 놈이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이라는 ×은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잡초가 무성하고 햇볕에 하얗게 바랜 플라스틱 조화 부스러기만 흩날리는 꼴이 싫어서, 1년에 두 번 이상은 아버지를 찾았다. 다이소에서 사들고 간 조화로 장식을 하고 콜라와 과자를 두고 오곤 했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지난 해 11월 5일. 아직 6개월이 채 안 됐는데, 아버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사고뭉치였다. 1톤 트럭으로 후진을 하는데 뒤에 차가 오는 걸 뻔히 보고서도, 내가 멈추라고 차를 탕! 탕! 두드렸는데도, 일부러 들이 받아버렸다. 그런 아버지를 타박하며 짜증을 내다 잠에서 깼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하청 업체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자랑이 된 기억도 있고,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면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는 큰 자전거를 타고 퇴근 기차가 멈추는 역까지 가서 아버지와 함께 돌아왔던 기억도 있는데, 좋은 기억 놔두고 왜 하필 저 따위 내용일까 의아했다. 아버지 묘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봐야 하나 싶기도 했고.

 


 

출근해서 부지런히 일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식사 후 티 타임을 갖기로 했는데 세 들어 사는 카페가 그 장소로 낙찰되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되어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대로 퇴근하면 딱 좋을텐데.

 

저녁을 먹고 남은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어 공부도 해야 하고, 엑셀 공부도 해야 하고, 파이썬도 하고 싶고,... 욕심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 좀 더 부지런해야 하는데 만사 귀찮다.

 


 

내일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한 잔 할 것 같다. 승진 발표를 앞두고 한 잔 먹는 문화(?)가 있는데,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음에도 한 잔 마시자고 한다. 휴직하기 전에 승진 후보 1순위였기에 복직하면 바로 승진할 줄 알았는데, 벌써 4년이 지났다. 동기들 중에는 나보다 두 계급이나 높은 사람도 있다. 관운이라는 게 있다지만 나는 본사 근무를 회피하고 있는데다 승진하기 좋다는 자리로 오라고 해도 안 간다고 도망친 적이 있으니, 승진을 바라는 게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관리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실무자로 남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문제는,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일하는 걸 보면 몇 년 안에 뒤쳐지겠고나 싶어 관리자로 올라가긴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는 거다.

아무튼, ㅇㅇ에 오고 나서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요즘이다. 버는 것도 늘었고, 일이나 생활의 만족도도 크게 올라갔다. 약도 끊었고, 우울증도 거의 앓지 않게 됐다. 계속 이렇게, 즐겁게 살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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