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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행 』

2017 히로시마 - 첫 날: 타국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17.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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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씻고 숙소에서 빈둥거렸음 좋겠지만 어디라도 다녀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만이라도 다녀오자고 마음 먹고 출발. 구글 지도 보면서 이리저리 헤메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어지간하면 그냥 맞고 다니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편의점 들어가 음료수 사면서 비닐 우산을 샀다. 오사카에서는 ¥300 정도 줬던 거 같은데 죄다 ¥600 넘는다. 비싸다고 생각하며 카운터로 들고 갔다. 그나마 일본어 공부했답시고 かさ(카사 = 우산)가 들린다. ㅋㅋㅋ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음료수를 비닐에 담아줄까요?'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 또 "스미마셍. 니혼고가 하나세마셍."을 씨부려야 했다. 왜 꼭 지나고나면 들리는 거지? 아무튼... 일본 가서 일본어 못한다고 떠드는 게 아주 그냥 전가의 보도여. -_ㅡ;;;


그렇게 우산 쓰고 헤매다보니 혼도오리(本通=ほんどおり) 등장. 근본 본(本)에 통할 통(通) 쓰는데 일본에서는 흔한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로, 중앙로, 뭐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혼도오리는 지붕이 있는 아케이드 상점가. 비가 와도 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다.




구글 지도 보면서 이 길이 확실하다 싶어 쭉쭉 걸어 나가니 금방 원폭 돔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어차피 내일 다시 올 거니까 라는 생각으로 일단 그냥 지나쳤다. 원폭 돔이 보이는 곳에서 계속 걸어가 길을 건너면 관광 안내 센터가 나온다. 거기에 들러 혹시 "치카쿠니 하나야가 아리마스까?" 하고 물어봤다. (近くに花屋がありますか。= 근처에 꽃집이 있습니까?)   꽃 = 하나, 가게 = 야,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말하는 게 어렵지 않구나~ 라 생각하니 일본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싶더라. 아무튼... 지도 꺼내어 친절히 현재 위치와 꽃가게 위치를 알려주셨다.


혹시라도 꽃가게 찾아가실 분이 있을까 싶어 적어 봅니다. 혼도오리에서 원폭 돔 쪽으로 걸어가다보면 오른쪽에 타이토 게임 센터(인형 뽑기)가 있고 왼쪽에 로손 편의점 있는 길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회전, 그러니까 타이토 게임 센터 있는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길가에 꽃집이 있습니다. 왔던 길로 돌아와서 원폭 돔 쪽으로 직진하면 오른쪽에 피규어나 프라모델 파는 가게 나오고 왼쪽에 식당 몇 개 나오다가 원폭 돔이 나옵니다.

          식당│   │

          식당│   │프라모델 가게

          식당│   │피규어 가게

            │   │

          ──┘   └─────────

                     꽃가게

          ──┐   ┌─────────

          로손│   │타이토

              ↑

             원폭돔


※ 정확한 건 아니고, 대충 이런 길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꽃가게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찾아들어가 "시로이 키쿠 구다사이" (白い菊ください。= 흰 국화 주세요.) 라고 했다. "얼마나 줄까요?" 라고 물어보기에 송이로 파는 줄 알고 다섯 개 달라고 했다. 다섯 송이 주는 줄 알았는데 다섯 다발이다. 너무 많은가? 싶어 세 개만 달라고 했다. 세 다발 잡더니 뭐라고 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다시 등장하는 "니혼고가 하나세마셍." 아오~


꽃이 기니까~ 밑동을 얼만큼 남겨줄까?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잘라낼까? 그걸 물어보는 거였다. 적당히 이 쯤이요, OK~ 하는데... 아무래도 꽃이 좀 부족해보인다. 다시 두 다발 더 달라 해서 결국 다섯 다발. 잔뜩이면 좋겠지만 돈이 넉넉한 게 아니니까... ¥1,000 조금 넘었던 것 같다. 포장된 꽃을 받아들고 다시 원폭 돔 쪽으로 걸었다. 한국인 위령비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아까 들렸던 안내 센터 뒤의 지도 보면서 찾아갔다. 원폭 돔 지나 큰 길 따라 그냥 계속 걷다 보면 오른쪽에 컨테이너 비슷하게 생긴 화장실이 나오는데 거기 뒤 쪽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다.




휑~ 하면 무척이나 마음 아플 것 같았는데... 꽃도 제법 있고 종이로 접어 놓은 장식도 꽤 많았다. 가지고 간 국화를 앞에 살며시 내려놓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참이슬을 꺼냈다. 원래는 같이 일하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녀석 주겠답시고 마트에서 네 개 산 건데... 어찌하다보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줬다. 집에서 혼자 소주 먹는 일이 거의 없기에 그럼 여행 갈 때 가지고 가자! 생각해서 들고 온 거였다. 한 꺼번에 네 개 다 놓을까 하다가 일단 하나만 들고 왔었던 거다.



꽃과 소주 내려놓고... 절 올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젖은 바닥에 엎드리고 나니 무릎께가 살짝 젖었다.





대가리가 빈 일본×이 테러했다는 무궁화 나무는 잘 복구되어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명복을 빌고 나오는데... 비도 오고 그래서 그런가 뭔가 짠~ 해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ㅠ_ㅠ



그냥 갈까 하다가 원폭 돔 근처까지 가보자 싶어 가까이 가서 사진 찍었다.



미군은 이 원폭 돔 근처에 있는 T자 모양의 다리를 표적으로 비행했다. 그리고 이 원폭 돔 상공에 핵 폭탄을 떨어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핵 폭탄이 지상에 충돌하며 터진다는 것인데... 핵 폭탄은 지상에 떨어지기 한참 전에, 꽤나 높은 상공에서 터진다. 여러 실험 결과 그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 폭탄도 지상으로부터 약 600 미터 상공에서 터졌다고 한다. 주변은 깡그리 날아가버려 흔적도 없게 되었지만 정작 이 원폭 돔은 폭발의 중심에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태풍도 태풍의 눈이라 불리는 가운데 부분은 조용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 뼈대만 앙상한 건물을 보기 위해 히로시마를 찾는 서양인들이 많다. 동양인들은 거의 없더라. 확실히 서양인들이 많았다.





『 맨발의 겐 』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때 당시의 참상이 잘 그려져 있다. 핵폭탄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도 사람이지만, 살아난 이들에게는 지옥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핵 폭탄 위력이라면 폭발한 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지점에 있는 생명체라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겠지만,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 폭탄은 지금 기준으로는 많이 약한 편이었기에 열선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가 더 문제였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사방이 시체로 들끓고 시체가 썩으면서 물이 오염되고 전염병이 퍼졌다. 거기에 먹을 것이 부족하다보니 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안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동족의 죽음까지도 장사로 이용해먹는 나쁜 놈들이 나왔다. 『 맨발의 겐 』에는 죽은 이들의 뼈까지 미군에게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조선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서 더욱 고생했다. 관동 대지진 때처럼 일본인들의 엄청난 핍박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도 식량 부족하다가, 더럽다고, 보기 흉하다고, 여러 이유로 내치는데... 한 수 아래 인종으로 취급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친절할 리 만무.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차라리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전 세계 유일의 핵 폭탄 피해자로써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아베 정권 꼬라지는 가관이다. 왜 핵 폭탄을 맞게 되었는지는 은근슬쩍 넘어가려들면서 그저 불쌍한 피해자 역할에만 충실하려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반성없는 과거는 반복하게 되어 있다. 제국 주의 일본이 왜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이 핵 맞아서 다행이다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핵 병기는 모조리 폐기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핵 병기의 위험함을 후세에 계속 알려야 한다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전쟁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거다. 평화롭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따위의 역사 교육으로 한국 전쟁을 알리면 안 되듯, 일본이 왜 미국에 의한 핵 폭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충분히 알려야 한다 생각한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 강에 물에 타 뼈와 살이 녹은 시체 수백 구가 떠다니고 있었다 하니... 무서운 일이다.



저 앞 쪽이 미군 폭격기의 표적이 된 T자 모양의 다리.



그렇게 사진 찍고 있는데... 응? 뭔 참새 한 마리가 코 앞에서 알짱거린다. 이 자식, 사람이 무섭지 않은 건가?



한국에서야 닭둘기가 워낙 걸어다니니 익숙하지만... 참새가 이렇게 사람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는 건 처음 봤다.



그냥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날아올라 나한테 앉으려고 몇 번을 시도하기에 밀어내기(?)를 시도해야만 했다.



일본어를 모르니... 뭐하는 분인지도 모르고 그냥 동상 있으니 찍고 있다. -_ㅡ;;;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있는 곳을 다시 거쳐 큰 길로 나왔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수학 여행 온 학생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왔다. 역시나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는 거다. '불쌍한 우리 일본에 핵 같은 무시무시한 병기를 썼어요, 나쁜 미국 놈들이' 따위로 가르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뭐, 일본은 역사 쪽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인 것 같긴 하지만.




사방이 학이다. 엄청나다고 할 정도로 종이 학이 많다. 일본에서는 센바즈루(千羽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종이 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학을 접어주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언제쩍 얘기냐고 구박 받을 이야기지만... 나 소싯쩍에는 학 접어대는 애들 엄청 많았다. 아마 어지간한 옛날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들 방에 가면 유리 병에 든 학 수 백, 수 천 마리는 우습게 나올걸?

아무튼...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 종이 학이 넘쳐나는 이유는 사사키 사다코 양의 사연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보편적이다. 1943년에 태어난 사다코 양은 원폭으로 인해 방사능 피해를 입게 되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백혈병으로 입원한다. 이 때 나고야에서 문병 온 학생들에게 종이 학을 받고 나서 자신도 종이 학을 접기 시작한다. 천 마리가 넘으면 자신의 병도 치유될 거라 믿었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한 다른 환자들도 종이 학 접기에 동참해서 한 달도 안 되어 천 마리를 넘겼지만 사다코 양은 11월이 되기 전에 죽고 만다. 이 사연이 일본에 널리 알려지면서 천 마리 종이 학은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이게 우리나라에 소원 들어준다는 식으로 넘어왔다.



'원폭의 어린이 상'이 들고 있는 것도 종이 학이다.





그렇게 다시 원폭 돔 쪽으로 나왔다. 다시는 있어서 안 될 비까 피해의 현장이었다.






http://pohangsteelers.tistory.com/1477 - 이번 히로시마/오카야마 여행 다녀와서 쓴 글들을 모아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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