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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행 』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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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게 이름도 유행을 탄다. 만 원 짜리 한 장으로도 맥주 두 잔에 안주 하나 먹는 게 가능했건 가게의 대명사처럼 사용됐던 ㅂㄱ비어 같은 경우 수많은 아류를 탄생시키기도 했더랬지. 요즘은 저렴한 맥주 가게가 한 물 가긴 했지만 만약 지금 창업하면서 ㅂㄱ비어 같은 이름을 쓴다고 하면 주위에서 다들 말리지 않을까?
  • 내가 어릴 때에는 사람이 몰리는 시내에 나가면 어김없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이라는 가게를 볼 수 있었다. 대개 카페였다.
  • 네일베에서 검색해보니 용인 말고도 천안, 양평, 군포에도 같은 이름의 가게가 있다. 천안은 맥주 파는 곳, 양평은 여관(모텔도 아니고), 군포는 정체 불명.
  • 용인에 있는 가게는 그 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식당 되시겠다. 경양식 음식점.
  • 미술 쪽으로는 아는 게 1도 없는 사람인지라, 샤갈(이 화가인 건 알고 있었다)이 그린 작품 중에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게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샤갈이 그린 '마을과 나'라는 작품을 보고 김춘수 시인이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쓰셨다고 한다. 아마 저 시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다.
  • 원래는 서울에서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다른 블로그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
  • 나는 지난 해부터 지나다니면서 보긴 했다. 하지만 뭔가 입장이 꺼려지는 분위기였다. 허름한 시골에 뜬금없이 피자, 파스타가 등장하니 그 퀄리티가 의심되기도 했고, 별로 맛도 없으면서 오질라게 비싼 가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는 중국 음식점 화루에는 뻔질나게 들락거렸으면서도 한 번을 안 갔다.
  • 그러다가, 갑자기 돈가스가 땡겨서 알아보던 중 저기가 경양식을 파는 가게라 해서 가보기로 했다. 도서관에 갔다가 '생각을 담는 집'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가면서 들릴 예정이었는데 주차장에 차가 너무 많더라. 한 대도 없을 때가 대부분인데 주말 버프를 받은 모양이다. 어지간해야 무시하고 주차할텐데 너무 많기에 일단 통과. 북카페에 가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숙소로 향하면서 잠시 고민했다. 먹고 갈까, 그냥 갈까.
  • 밥을 안 먹고 가면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야 한다. 혼자 있으면 그냥저냥 끓여서 먹겠는데 룸 메이트가 있으니 신경이 쓰인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도착. 모든 메뉴가 포장된다 하니 포장을 하는 게 나을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포장하면 쓰레기도 많이 나오고 이래저래 번거롭다. 그냥 먹고 가자.
  • 빈 자리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여덟 명 정도 되는 가족 단위 추정 손님이 한 테이블. 할머니라 하기에는 적고 아줌마라 하기에는 많은, 할줌마들 네 명인가가 한 테이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하필 할줌마들 패거리 앞 자리였다. 쉴새없이 떠들고 있어서 걱정이 되더라. 저 네 명 중 한 명이라도 코로나 환자가 있다면 빼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자리에 앉으니 바로 메뉴를 가져다 주신다. 이미 인터넷으로 함박, 돈가스, 생선 가스가 다 나오는 메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걸 시켰다. 이름은 샤갈 정식이고 가격은 13,000원.

 

딱 경양식 가게스러운 인테리어, 브금(칸츄리 롣~~~ 이 실제로 나왔다), 접시, 음식들. ㅋ

 

세상 좋아져서 온갖 다양한 맛의 스프가 나오지만 내 또래에게 스프란 역시 딱 이런 비주얼

 

  • 스프와 김치, 단무지를 가져다 주셨다. 스프는, 국민(초등 아니고)학교 시절에 경양식 집에서 먹던 딱 그 맛. 오뚜기 스프 밍밍하게 탄, 딱 그 맛이다. 김치는 그냥저냥 평범. 국산 김치를 쓰는 가게는 극히 드물테니 중국산일텐데, 헐벗은 중국 아저씨의 피부 맛이 느껴지는 듯 해서 한 점 집어먹은 뒤로 쳐다도 안 봤다. 한 입 크기로 작게 썰려나온 단무지는 시큼하지 않고 달달하더라.
  • 음식이 순식간에 나왔다. 자리에 엉덩이 붙인 지 10분? 아니, 10분이 뭐야. 5분도 안 되서 나온 것 같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음식. 진짜 빨리 나오더라.

 

  • 함박은 굳이 칼로 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다. 먹으면서 기분 좋았던 게 소스를 아끼지 않았다는 거다. 소스가 간당간당하면 더 달라 소리하기 귀찮아서 있는대로 적당히 아껴 먹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그냥 막 퍼먹어도 된다. ㅋ

 

 

  • 같이 나온 우동 국물은 칼칼한 매운 맛이 있다. 국물에 빨간 기가 없으니 고춧가루는 아닌 것 같고, 후추로 이렇게 매운 맛을 낼 수가 있나? 싶더라.
  • 돈가스는 질겼다. 잘 안 썰리기도 했고 씹을 때도 제법 저항감이 느껴졌다. 생선 가스는 바삭하게 썰렸고 비린 맛은 금붕어 눈꼽 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타르타르 소스 역시 넉넉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곁들어 먹는 풀때기와 콩도 나쁘지 않았고.
  •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오거나 하면 아빠가 어김없이 시내의 경양식 가게에 데리고 갔었더랬다. 100원 넣고 뽑은 오늘의 운세도 필수 코스였고, 환장하고 돈가스를 먹은 뒤 장난감 하나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물론 그 뒤로 아빠와 엄마는 돈을 많이 썼네 어쩌네 하며 정색하고 싸웠다). 그 옛날의 맛이 떠올라 나름 유쾌했다.
  • 주말에는 손님이 많으니, 그리고 그 손님들 중에는 부동산 얘기하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할줌마들처럼 방역 수칙 개무시족들이 있을 수 있으니 안 가야겠다. 평일에 쉴 때 어슬렁거리고 가서 밥 먹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주문하고 다 먹기까지 30분도 채 안 걸렸는데 다음에는 좀 느긋하게 먹고 와야겠다 생각했다.

 

손님이 많아서 바빴는지 제대로 설거지 되지 않은 접시에 음식이 담겨져 왔다.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먹었다.

이런 걸로 굳이 항의하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찝찝하긴 했다.

 


 

처음 갔을 때에는 설거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접시에 음식이 담겨져 나왔다.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까, 대략 그 정도의 청결도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두 번째 갔을 때 10분 만에 음식을 다 먹었더니 벌써 다 먹었냐며, 커피라도 마시겠냐고 물어봐주셨다. 친절하시더라.
하지만 세 번째 방문했을 때 빈정 상했다. 사무실 선배와 같이 갔는데 피자 싸달라고 했더니 '진작 말할 것이지.' 라고 두 번이나 궁시렁거리더라. 다 들리게.   아니, 먹다가 남은 걸 싸달라고 해야 하는 타이밍이 따로 있는 건가? 계산하고 나갈 때 싸달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 거 아닌가? 게다가 알루미늄 호일 상자에 대충 턱턱 담더니 뚜껑 아귀도 안 맞는데 짓이기듯 닫고는 고무줄로 대충 묶어 준다. 저 날 샤갈 정식에, 파스타에, 피자에, 4만원 넘게 나왔는데 괜히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송할 정도의 친절함을 바라는 게 아니다. 상식 수준의 접객이 이루어져야 할 거 아니냐고. 다른 사람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맛은 있는데 청결과 친절은 개판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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