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돈 벌러 다니는 곳에는 내 자리가 없다. 임무에 따른 자리가 있고 교대 근무자가 자기 근무 때 그 자리에 앉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통도, 슬리퍼도, 근무하는 곳에 두지 못하고 한 곳에 치워 놨다가 일하러 가서 쓰기 편하게 옮겨 놓는다. 일하기 전에 이것저것 손에 닿도록 정리해야 하는 몸인지라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적당히 일찍 가는 편이다.
최근 사무실에서 띄엄~ 띄엄~ 확진자가 나오면서 혹시 모를 전염에 대비해서 일찍 들어오지 말라는 지시가 나왔다. 혹시라도 일찍 출근하게 되면 사무실에 들어오지 말고 별도의 공간에서 기다렸다가 먼저 근무한 사람이 나가고 나면 들어오라는 거다. 다른 사람들은 휴게실에서 스마트 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던데 나는 회사에 손전화를 아예 안 들고 가니까 딱히 할 일이 없다. 멍 때리고 있자니 시간도 안 가고 해서,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춤했던 독서량이 확~ 느는 계기가 됐다.
가장 선호하는 장르는 일본 소설이고, 그 다음이 여행기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몸이 근질근질한터라 다른 사람의 여행기라도 읽어야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거다. 그리하여 며칠 전에 빌려온 책이 『 뒤죽박죽 오사카 여행기 』 되시겠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따위 글도 책으로 만들어주는고나 싶더라. 내가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가 훨씬 낫겠다는 자신감이 마구 솟아 올랐다.
글쓴이는 20대 초반의 어린 처자. 가족과 함께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자유 여행으로 외국에 나가는 건 처음인 사람이다. 글쓴이가 '걔'라 일컫는 친구와 함께 4박 5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인데, 여행지에 가는 방법이나 여행 팁 같은 건 1도 없다. 그래, 여행 가이드 북이 아니니까 그런 건 없을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있었던,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담백하게 풀어나가기만 해도 좋지.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소소한 기대마저 무너뜨렸다. 글에서 시종일관 볼 수 있었던 건 같이 간 친구 때문에 짜증났다는 것과 길 잃고 헤맸다는 게 전부다. '이걸 왜 읽고 있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따위가 할인해서 12,000원에 가까운 가격에 팔리고 있다고? 내 블로그에 있는 여행기는 12만 원 받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작가를 탓하는 게 아니다. 20대 초반이고,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니까 얼마든지 서투를 수 있다. 읽을만한 내용이 없다는 건 큰 흠이지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원래 재미없는 글에 출판사의 무능함이 더해져 최악의 종이 낭비가 되고 말았다. 숙소에 '묵다'를 '묶다'로 쓰고, 짐을 '부치다'를 '붙이다'로 쓴 책이 출판되어 팔리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 게다가 여행 관련 책자인데 기본적인 확인조차 하지 않아서 니넨자카를 나넨자카로 써놨다. 계속 반복되는 걸 보면 오타가 아니다. (니넨자카 = 二年坂: にねんざか - 니 = 2, 넨 = 년, 자카는 고개, 비탈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사카라 읽어야 하지만 2년과 결합되어 발음하기 쉽게 자카가 되었다. 니넨자카는 2년 고개라는 뜻으로, 저기서 넘어지면 2년 밖에 못 산다는 곳이다. 저기서 넘어져 2년 밖에 못 산다고 우는 아이에게 계속 넘어져서 2년씩 적립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근처에 3년 고개도 있다. 3년 고개는 산넨자카.)
버스 노선이나 요금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해당 지역의 관광 정책도 바뀌기 나름이다. 돗토리에 놀러 갔을 때 유용하게 이용한 1,000円 택시는 지금 없어졌기 때문에 내 여행기를 참고해서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코로나가 끝나면 여행 업계 살린답시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그러니 여행기는 여행 정보를 얻는다기보다는 글쓴이가 겪은 경험을 보면서 간접 체험하는 게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불평과 짜증 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으니... 남아도는 게 시간인지라 어떻게든 헛되이 보내고 싶다는 사람 외에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저 책을 다 읽고 난 후 읽은 게 『 나는 마흔에도 우왕좌왕했다 』 되시겠다. 인기 만화 겸 애니메이션인 『 호빵맨 』의 작가 야나세 다카시氏가 지은 책이다.
나는 자기 개발서로 분류되는 책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당연한 얘기를 그럴싸하게 적어 결국은 글쓴이만 돈 버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주는, 거지 발싸개 같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서 감탄했다. 역시, 9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이가 하는 말은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징집되어 중국 땅에서 전쟁을 겪고, 중국 인민을 해방한다는 정의로운 역할인 줄 알았던 전쟁이 사실은 침략 전쟁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 못된 전쟁에서 동생이 죽고, 전쟁 후의 어려운 시기를 넘겨내고, 이렇다 할 히트작 없이 근근히 버티고, 그러다 늘그막에 인기작을 만들어낸(실은 그 전에 만든 것이 뒤늦게 빛을 본 것이지만) 노 작가의 이야기에는 묵직한 힘이 있다. 이 책이라면 구입해서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봤던 책이 너무 실망스러웠던지라 상대적으로 더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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