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세키가하라'인데 한국판은 뒤에 '대전투'가 붙었다.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전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저 이름을 듣는 순간 치열했던 살육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나라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역사도 지루해하기 마련인지라, 한 명이라도 더 보게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제목 낚시질)이 아니었나 싶다. 대전투? 전쟁 영화야? 한 번 볼까? 뭐, 이런 걸 노린 게 아닐까?
잠깐 검색해보니 혹평이 자자하다. 위에서 예상한대로, 대전투라더니 전투 장면은 30분도 안 된다고 씹는 글이 가장 많다. 거 봐, 괜히 낚시질하려다 오히려 욕만 얻어 먹는다니까. 😑
이 영화는 일본 역사에 관심이 없으면 재미있게 볼래야 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엄청난 분량의 역사적인 배경을 줄이고 또 줄여 두 시간 반 분량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 반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60분짜리 24부작 다큐멘터리로도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니까 이 영화는 팔, 다리는 물론이고 몸통까지 다 잘라내고 얼굴만 대충 훑어보는 수준과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2017년 8월 26일에 개봉해서 2주 정도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식 개봉하지 못하고 2019년 6월 3일에 네일베, 웨이브, 티빙 등의 OTT 서비스를 통해 유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가격은 시나브로 떨어져 글 쓰고 있는 2022년 4월 16일 기준으로 1,540원. 여러 개의 OTT 서비스가 짠 것처럼 가격이 똑같은데 이거 담합 아닌가?
일본 역사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도 유명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지. 한국인이 싫어하는 일본인 TOP 3에 무조건 들어가니까.
저 세 사람의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다. 시바 료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 나는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소설 『 도쿠가와 이에야스(우리나라에는 『 대망 』이라는 제목으로 무단 번역되어 유통됐었다.) 』를 통해 어느 정도의 스토리와 등장 인물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럭저럭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관련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인데도 중간에 몇 번 졸았고, 자막을 미처 다 읽지 못했다. 그러니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영화가 될 게 분명하다.
절대 왕권 국가로 자리매김하여 명맥을 이어온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은 오래 전부터 지방 자치제였다. 동네마다 어깨에 힘 좀 주는 사람들이 제각각이었는데 중앙에서 열도 전체를 통제할 수 없었기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해준 거다. 그냥저냥 그렇게 잘 살면 괜찮은데 내 능력에 비해 가진 땅덩이가 작다가 생각하는 영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들은 힘으로 주위를 눌러가며 본인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중 두각을 나타낸 이가 오다 노부나가였다.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기, 이제 막 총이 소개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총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며 순식간에 성장했고 다른 영주들의 견제를 받을 정도가 된다.
무서울 것 없이 승승장구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라는 부하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죽고 만다(라 하지만 살아서 이랬네 저랬네 하는 카더라가 수도 없다. 😑). 권력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주군의 복수를 앞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게 되고, 지방 영주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당시의 포상은 모두 땅(에서 나는 쌀)으로 주어졌는데 더 이상 줄 땅이 없게 되자 해외로 눈을 돌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조선을 침공한다. 섬나라 쌍 것들 취급하며 발가락 때만도 못한 존재로 우습게 보다가 갑작스럽게 공격 당한 조선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중에 죽게 되고 그의 아들인 히데요리는 아직 어렸기에 2인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낸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집권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반(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의 선봉에 서고, 두 편으로 갈라진 지방 영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박 터지게 싸운 게 세키가하라 전투 되시겠다.
어때? 머리 아프지? 하지만 이건 RAR은 울고 갈 정도로 엄청난 압축을 해버린 거다. 대략 저런 분위기로 흘러갔다는 거지, 저 과정에서 이 놈 튀어나오고, 저 놈 튀어나오고, 등장 인물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게다가 '사무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달리 서로 저 살겠다고 눈치 싸움하고, 배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관심이 있다면 나무위키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으니까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https://namu.wiki/w/%EC%84%B8%ED%82%A4%EA%B0%80%ED%95%98%EB%9D%BC%20%EC%A0%84%ED%88%AC
글 읽는 걸 싫어한다면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개인적으로는 써에이스쇼 채널에 있는 총정리 영상을 추천한다. → https://www.youtube.com/watch?v=qzPa-SlXldw
지금이야 도쿄가 정치, 행정의 중심 도시지만 오래 전에는 교토가 수도 역할을 했다. 그 교토를 기준으로 서쪽을 관서(간사이), 동쪽을 관동(간토)이라 부르는데 이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 아들) 추종 세력은 서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동군이 된다.
진의 배치를 놓고 보면 서군이 동군을 산골짜기에 가둬놓은 형국인지라 간단히 쌈싸먹는 걸로 끝날 전쟁이었는데 제 잇속 차리느라 관망하는 세력, 배신하는 세력이 나오면서 결국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장에서 이탈해 자기 영지로 숨어드는 데 성공하지만 이내 마을 주민에게 발각된다. 군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농사 짓다가 오라고 부르면 쪼로로~ 달려가서 창 들고 싸우고, 그러다 도망치고, 다른 패잔병들이 보이면 덤벼들어서 죽인 뒤 가진 거 다 뺏고, 그런 살벌한 시대였던지라 패주한 적장이라고 베어버려도 될 법 한데, 마을 주민은 영주를 알아보고 먹을 것을 갖다주며 도와준다. 하지만 미츠나리를 쫓는 이들이 다가오자 이대로 발각되면 자기를 도왔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며 빨리 보고해서 살 길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결국 붙잡힌 이시다 미츠나리는 참수 당하고, 얼마 뒤 두 번의 오사카 전투를 거친 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게 된다. 영화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참수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함을 소리나는대로 읽어 태합(太閤)이라고 번역했는데 고유 명사이니만큼 '다이코'로 쓰는 게 좋지 않았나 싶다. 저 외에도 여기저기 번역 오류가 눈에 띈다.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이 번역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잖아도 어려워서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힘든 작품인데,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도 외면 받는 번역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우리나라에 『 대망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더랬다. 문제는, 작가와 판권 계약을 따로 하지 않고 무단으로 번역해서 책으로 내놨다는 거다.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형편 없었다는 걸 이유로 대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https://blog.naver.com/kcc_press/222238118431 ←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간단히 몇 자 적어보자면 ① 무단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는데, ② 이후 저작권 관련 협회에 가입하지만 소급 적용되지는 않아서 불법으로 취급 받지 않다가, ③ 다른 협약(이건 소급 적용)에 가입하게 되면서 과거에 무단으로 번역/출판한 게 문제가 되어, ④ 검찰이 문제 삼았다. 1심과 2심은 출판사가 잘못했다고 판단했는데, ⑤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면서 2015년에 오타와 번역을 개선한 새 버전이 버젓이 나와버렸다. 뭐, 그런 얘기 되시겠다. 어쩌면 서울문화사의 『 은하영웅전설 』도 비슷한 케이스 아닐까 싶은데 찾아보려니 귀찮...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과거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케치 미츠히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이시다 미츠나리를 악역의 자리에 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이들을 재평가해서 주인공으로 삼는 작품들이 많아진 것 같다. 아니, 딱히 최근이라 할 것도 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시각이 존재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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