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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일기 』

2023년 12월 31일 일요일 흐림 (…)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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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마지막 날. 흐린 날씨 때문에 해가 넘어가는 걸 보기 어렵다고 한다. 나가 봤더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확실히 일몰을 보기 어려운 날씨인 것 같다.

 


 

거리에도, 저렴한 생활용품 판매점에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온 걸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원래 외국인이 많은 동네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큰 길 한 켠에 모여 서서 삐딱하게 선 채 침을 뱉어가며 담배 피우는 꼴을 보니 없던 외국인 혐오도 생길 것 같다. 밖에서 저렇게 새고 있으니 자국으로 돌아가면 더 많이 새는 바가지가 되겠지. 외국에서 살아봤다고 잘난 척 하는 바가지가 될까?

 


 

마트에서 김치찌개用 참치 통조림과 쓰레기 봉투만 사들고 나오느라 두부를 잊었다. 두부를 넣지 않은 김치찌개를 끓여서 먹어야 할 판이다. 귀찮아서 다시 사러 갈 리도 없고 집 근처 편의점에서 두부를 팔지는 않으니까.
└ 예상을 깨고 퇴근 후 마트에 가서 순두부 사들고 왔다. 마구 뿌듯하다.

 


 

종종 가는 동전 빨래방 근처에 있어서 가끔 이용했던, 테이크 아웃 아메리카노를 2,500원에 파는 가게가 망했다. 연말인데 쉬는 건가 싶어 내부를 봤더니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제법 넓은 공간을 빡빡하게 쓰지 않고 널찍하게 쓰기에 여유로워 보이는 곳이었는데.

 


 

하얀 패딩을 입은 어린 처자가 녹색 쓰레기 봉투를 무심하게 휙~ 던지고 간다. 그 앞에는 쓰레기 버리는 곳이 아니라는 안내막이 두 개나 걸려 있다.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 여러 나라 말로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다.

내년부터는 자기 집 앞에 버리면 수거해 간다는데, 버리지 말라고 해도 저렇게 버려대니 궁여지책을 쓴 것인가 싶기도 하고, 집집마다 일일이 멈춰가며 쓰레기 수거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

 


 

거기서 몇 걸음 안 걸으면 또 쓰레기를 모아둔 곳이 나온다. 할머니라 하기에는 아직 젊은, 하지만 세월의 무게로 어깨가 잔뜩 쳐져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분홍색 쓰레기 봉투를 해체하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 싶어 안 보는 척 하면서 힐끗, 훔쳐 봤더니 여유 있게 묶어 버린 쓰레기 봉투를 풀어 다른 봉투에 담긴 쓰레기를 옮겨 담고 있었다. 아... 저렇게 해서 쓰레기 봉투를 하나 장만하려는 거고나. 봉투 하나에 몇 푼이나 한다고... 하지만, 그 몇 푼이 아쉬워서 저러는 거겠지? 정말 그 몇 푼이 아쉬워서일수도 있고, 단순히 아깝다는 생각에 돈이 있어도 저렇게 살지도... 아무튼, 꿈 많은 학창 시절에 나이 먹고 쓰레기 봉투 헤집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텐데...

 


 

누군가의 꿈이 담긴 카페는 망해서 빈 건물이 되었고, 남이 버린 쓰레기 봉투를 뒤져가며 절약을 몸소 실천하는 아주머니가 있는 2023년의 마지막 날에도 아파트가 올라간다. 인구는 계속 줄어든다는데, 아파트는 꾸역꾸역 늘어간다.

나는 45년을 살면서 아파트는 커녕 아파트 현관만 살 돈조차 모으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빨간 머리의 아이캔이 에어스타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원더키디의 세상에서 3년이 더 흘렀는데도 100만 원 짜리 드론을 하늘로 날려보내며 대리 만족하는 게 전부인 21세기. 내일이면 2024년이다.

 

 

딱히, 희망적이지 않은, 새 해가 시작되려 한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회사에 들고 다니는 에코 백을 내려놓자마자, 모자로 까진 대가리를 가리고 다시 나갔다. 종종 들리는 순댓국 가게에 가면서 맥주를 마실까 소주를 마실까 고민했다.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건 아직 넘지 못한 벽이다. 그렇게까지 아저씨가 되고 싶지는 않다.

"순대 하나 포장해주세요."라고 하니 5분 정도 걸린단다. 이 때다 싶어 마트로 향했다. 팽이 버섯과 순두부를 하나 사들고 순댓국 가게로 돌아가니 포장 준비가 한창... 인데... 뭔가 이상하다. 순댓국을 담고 있다. 잽싸게 얼마 결제됐나 봤더니 8,000원이다. 아... 내가 원하는 건 모듬 순대였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순댓국으로 알아들었고나...

 

이거 아니라고, 순대 싸달라고 할 용기도 없는 나. 감사 인사를 하고 받아 들었다. 모듬 순대였다면 고민이 필요했겠지만, 순댓국은 고민이 필요 없지. 소주다.

 

편의점에 들어가 숙취로 힘들어하며 마실 보리차를 봤더니 하나 더하기 하나. 1.5ℓ 두 개를 끙끙거리며 들고 나서 소주 한 병을 집어들었다. 2,000원. 아... 편의점에서 소주가 2,000원이고나.

 


 

한 달에 50만 원으로 살 때가 있었다. 집에서 부쳐주는 돈이 그렇게 간절했다. 창문 하나 없는, 자다 뒤척이면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작은 침대가 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시원에 20만 원을 내고 나면 3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남들 다 삐삐 쓸 때 얼리 어답터랍시고 PCS를 썼기에 휴대 전화 요금을 내야 했고, 학교까지 왔다갔다 하기 위해 필요한 지하철 정기권을 사야 했다. 그렇게 꼭 쓸 돈이 나가고 나면 하루에 5,000원 짜리 밥 한 끼 사먹기도 아쉬었다. 당연히 술자리에 낄 수 없었지만 밥도 얻어 먹고 술도 얻어 마셨다. 그러다 장학금이 나오면 하루에 다 써서 신세 갚는답시고 꼴값을 떨었다. 군대 가서 받은 월급 모아 영등포의 나이트 클럽에서 200만 원 어치 술 마시기도 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없이 살 때,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에 700원이었다. 새우깡이 2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 기억에는 1,000원 짜리 하나 들고 가서 소주 한 병이랑 새우깡을 사면 100원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1,000원 짜리 한 장씩 든 세 명이 그렇게 편의점 앞에 모여 앉아 없는 돈으로 소주를 마시며 쌘 척을 했더랬다. 지나가는 중국 집 배달부를 불러 단무지 좀 달라고 시비 걸었다가 패싸... 흠... 흠...

 


 

집에 와서 순댓국을 안주로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맥주를 마시다 보니 새 해가 되었다. 2024년. 어색하다. 뭐, 년도가 어색했던 건 꽤 오래 된 것 같다. 앞 자리가 2로 바뀔 때부터 어색했던 것 같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은 시나브로 흐릿해져 이제는 제대로 중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뤄놓은 것은 없고, 이루고 싶은 것은 많으면서 불만만 쌓여간다.

 

좀 더 덜 부끄럽게 살자고 다짐해본다. 약한 이에게 약하게, 쌘 AH 77I 한테 쌔게 덤벼들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그 따위로 살아도 손해볼 거 없도록, 약점 잡히지 말고 살자고 마음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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