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한비자(韓非子)의 ‘세난편(世難篇)’에 나오는 ‘역린지화(逆鱗之禍)’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서양에서 그려지는 용은 입으로 불을 뿜어내는 사악한 존재지만, 동양의 용은 신비한 힘을 가진 미지의 생명체다. 서양의 용은 무조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당인 반면, 동양의 용은 하는 짓(?)에 따라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멸망급의 시련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중국의 고사성어에서 비롯되었으니 역린은 당연히 동양의 용에 있는 비늘을 말한다. 여든한 개의 비늘 중 딱 하나가 반대 방향으로 돋아 있는데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거다. 이걸 건드리면 용은 건드린 이를 끝까지 쫓아가 죽인다.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맞딱뜨려 같이 성장한, 형제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역린을 건드리면 가차없다. 바로 죽는 거다.
살면서 용을 볼 일이 없기에 역린은 용의 비늘이 아니라 직장 상사의 발작 버튼을 뜻하는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갖은 꼴통 짓을 한 끝에 누구도 모르는 대학에 들어간 자식이 있는 부장 앞에서 과장이 자기 자식이 서울대 들어갔다며 으스대면 그게 바로 역린을 건드리는 셈이 된다.
뭐, 말은 안 하지만 누구나 역린을 가지고 있을 거다. 다른 누구도 언급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 그 얘기 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 말이다.
나도 그런 게 있는데 이게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남들은 '쟤 갑자기 왜 저래?'라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혼자 빡! 하고 올라와서 손절해버리는 거다.
3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와 인연을 끊었는데, 그 때에도 친구가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통화하던 중 그 친구가 나를 무시한다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는 걸 그 친구가 듣는다면 '내가 언제?' '내가 뭐라고 그랬는데?'라고 발끈! 할 게다. 맞다. 그 친구가 직접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 속에 뼈가 있다고,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해 보이는 대화에서 무시를 느꼈다. '너는 나보다 한~ 참 부족한 녀석인데 용케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 들어가서 그냥저냥 살고 있고나' 하는 뉘앙스를 느낀 거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수 있다. 긁힐만 한 대화를 한 적이 없는데 혼자 질알한다고 느낄 테니까 말이지.
이건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관련된 거라서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그렇게 느꼈고, 내가 손전해야겠다 판단해서 실행으로 옮겼다는 거다. 그로 인해 30년 가까이 연락하고 관계를 유지하던 녀석들과 모조리 연이 끊어졌지만, 그래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로 인한 득이나 실은 오롯이 내가 짊어지면 될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다시 만나게 된 동생들과도 마찬가지다. 별 것 아닌데, 상의가 아니라 저들 둘이 결정해놓고 나한테 통보하다시피 말했다는 이유로 질알 발광을 하고 연을 끊었다. 낳아준 어머니와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친구와도 등지고, 가족과도 남으로 살고 있다. 금전적인 손해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아쉬울 때도 종종 있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노력에 따라 관계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 한들, 그럴 맘이 없다.
써놓고 보니 문제는 내 쪽에 있고나 싶은데, 어쩌겠어. 애초에 이런 인간인 것을.
《 내가 딱 이런 인간이다 》
그제 친척 형이 전화를 걸어와 자기 아들이 내 국가대표 유니폼을 가지고 싶어하는데, 가져도 되겠냐는 전화를 걸어왔고, 이게 내 발작 버튼을 눌렀다.
나이키 로고가 가슴팍에 박혀 있는 걸 본다면 10만 원은 넘을 거라 예상할 수 있지 않나? 저 인간들의 수준이라면 '티셔츠 한 벌에 얼마나 한다고'라 할 게 분명한데, 저 따위 전화를 해왔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 60만 원 짜리 로드 바이크를 공짜로 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로 퉁친 사람들이다. 남의 방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적거린 것도 어이가 없는 판에, 가져가면 안 되냐고? 게다가 내가 안 된다고 했더니 뒤에서 형수로 추정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거 골라봐'라고.
하... 뭐, 저런 거지 같은 것들이 다 있을꼬.
고모 댁에 맡겨놓은 것들은 옷과 책이 대부분이고 한 쪽 구석에 카메라 같은 전자 제품이 일부 있다. 여행용 가방도 있었는데 그건 진작에 내 의사와 무관하게 가져다 썼더라. 고이 보관해줘야 할 물건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차피 안 쓰는 거니까 언제든 막 갖다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괘씸하다.
고모한테는 자기 자식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손자/손녀일 게다. 나는 3순위지. 그런데 손자/손녀가 내 물건을 탐한다면? 못 이긴 척 가져가라고 할 게 분명하다. 자식이 원한다면 망설이지 않게 줘버리겠지. 나는 보관되기를 바라고 맡긴 건데, 자기 물건인 양 다루는 거다.
이게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다 퍼준 댓가인가? 그냥 가만히 뒀으면 꼬박꼬박 황금알을 낳아줄텐데, 왜 배를 가르려드는지 알 수가 없다.
명절에 유명한 얘기 있잖아. 조카가 와서 피규어나 건프라 같은 거 건드리거나 망가뜨려서 화를 냈더니 다 큰 애가 장난감 가지고 질알한다고 오히려 면박 줬다는 얘기. 딱 그 얘기가 떠올랐다. 다 같아 보이는 유니폼도, 몇 년도 꺼, 몇 년도 꺼, 다 따져가며 모았던 거고 스토리와 추억이 얽힌 것들인데 똑같은 옷 여러 벌 있으니 하나 정도 가져가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마구 손 댔을 거라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더 이상 저기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 고모 댁에 가서 짐을 가져올 생각이다. 1톤 트럭은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려면 못 줘도 20만 원은 줘야 할 것 같아 그냥 내 차로 옮기려 한다. 다 가져오는 건 무리고, 유니폼이랑 책, 카메라 정도만 챙겨서 올까 싶다. 어차피 다른 옷들은 작아서 입지도 못할 거고.
단순히 고모 댁에 맡겨놓은 물건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물건을 가져오면서 연을 끊을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 발작 버튼을 누른 사람들과는 다 그렇게 관계를 마무리지었다. 그게 당연했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누가 조금만 잘해주면 감동 받아서 받은 것의 몇 배를 갚아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가면서 욕심을 내니 어쩔 수 없다. 마침 비어있는 상자가 몇 개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어가 일 좀 하고, 점심 무렵에 가서 싹 들고 올 생각이다.
직장 동료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내일 오후에는 거기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아무 일도 없는데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기에 무슨 일 있냐고 물(은 건 다른 사람)었더니 본인 아버지가 자기 정장 차림을 좋아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에는 정장을 입는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편찮으시기는 하지만 위독하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오늘 갑작스레 부고를 접해서 많이 놀랐다. 해외에 근무하는 남편 만나러 간다고 다음 주에 해외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상을 당한 본인은 얼마나 놀랐을꼬. 게다가 돌아가신 요양 병원 근처에 장례식장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상심이 클 게다. 큰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경사는 못 챙겨도 조사는 챙기자는 마음이니까, 잠깐이라도 다녀올까 싶다.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공 차러 가볼까 했는데, 날씨가 궂어서 장소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바이크로 갈 수 있음 갈텐데, 차 가지고 가는 건 조금 꺼려진다. 아무래도 4월이나 되어야 운동하러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실~ 컷 놀고 오늘 하루 일한 뒤 또 이틀 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 이틀을 꽤 바쁘게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나 상복으로 입을 옷이나 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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