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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일기 』

2020년 09월 14일 월요일 맑음 (건방짐의 댓가)

by ㅂ ㅓ ㅈ ㅓ ㅂ ㅣ ㅌ ㅓ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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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업무를 전담하던 A氏가 있었다. 이 사람이 휴가를 가거나 비번일 때에는 B氏가 그 업무를 맡아서 해야 했다. 하지만 업무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결국 아무 관계없는 내가 느닷없이 땜빵 요원으로 발탁되어 ○○○ 업무를 급하게 배우게 됐다. 혹시라도 못하겠다고 내팽개칠까봐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우쭈쭈 해줬는데 난 내가 잘나서 그런 소리 듣는 건 줄 알았다.

  • 금요일에, ○○○ 업무를 하던 B氏가 하던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퇴근해버렸다. 뭔가 미리 약속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점심 시간이 지난 후 내가 급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처음부터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남이 싸다 만 똥 이어 싸는 꼴이라서 짜증이 났다.
    아무튼 내려가서 이것저것 만지다보니 B氏가 환경 설정을 잘못한 것 같더라. 마침 다른 직원도 그런 것 같다는 의견을 전달해와서, 제법 고민을 한 끝에 원래의 설정을 반대 값으로 바꿔놨다. 그리고 B氏가 능력도 없이 무책임하다고 속으로 엄청 궁시렁거렸다.

  • 그리고 오늘. 내가 반대로 설정한 게 오히려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아침부터 밑에 내려가 다시 설정을 하는 동안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B氏를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책임감도 없는 사람이라 깠고, 내가 뭔가를 하면 사사건건 발목 잡으려 드는 옹졸한 사람이라 생각했더랬다. 저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름 잘 하고 있다고, B氏에게 문제가 있다고, 은연 중에 떠들고 다녔다.

    아니었다. 정말 형편 없는 건 나였다. 설정 값을 반대로 한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실수였지만 나는 그 반대로 한 설정조차 온전히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으로 일을 한 거다. 그런 주제에 누구를 까고 어쩌고. 나란 인간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 결국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하루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고 있었다. 하필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 투성인지라 뭔가 성과를 낼 수도 없었다. 월요일부터 지독한 우울함에 빠져 일은 일대로 못하고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 나는 높이고 남을 깎아내리려 든 업보다. 겸손해야 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했는데 시건방을 떨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일로 많이 배웠다. 나란 인간이 한참 부족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저녁을 먹고 바로 퇴근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맥주가 두 캔 남아 있더라.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술 마시면서 일기를 쓰고 있다. 그나마 배드민턴 누님들한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수다 떠느라 마음이 좀 가라앉긴 했다. 오늘은 일찌감치 누워서 빈둥거리다 자야겠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공부도 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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