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얼리 어답터였다. 지금이야 손전화에 카메라가 죄다 달려 나오는 세상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카메라는 있는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레어템이었거든. 아버지는 그 비싼 카메라를 여러 대 가지고 계셨다. 카메라 뿐만 아니라 워크맨도 여러 대 있었는데 원하는 걸 사기 위해 포항에서 부산까지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중학생이 되니 가지고 계시던 녀석 중 그냥저냥 쓸만한 걸 한 대 주셨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이미 마이마이를 받은 적이 있지만 소니나 아이와는 겉으로 풍기는 포스부터가 달라 비교할 수도 없더라.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생활을 할 때에도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 때에는 이미 CD 플레이어가 상당히 보급되었고 MD도 많이 퍼져 있었지만 나는 워크맨이 그렇게 좋더라. 원하는 모델 사겠답시고 남대문 시장을 헤매고 다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년도 더 됐는데.
군대 가고 나서부터 엠피삼 플레이어가 슬슬 보급되기 시작하더라. 아버지의 피를 받은 나도 가전 제품 쪽으로는 새로운 뭔가가 나오면 눈부터 뒤집히는지라, 여러 대를 질러서 썼다. 아이리버의 클릭스가 정말 맘에 들었었는데.
아무튼.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 워크맨이 한 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수 년 전에 테스트 겸 건전지를 넣어보니 잘 돌아가기에 고장나지 않은 걸 신기해하며 모셔뒀고.
며칠 전에 술 마시다가 듣고 싶은 노래가 생각나 유튜브에서 검색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사버렸다. 그리고 나서 워크맨이 잘 되는지 정말 오랜만에 꺼내봤다.
김현식 - 내사랑 내 곁에/서지원 - 또 다른 시작/이범학 - 이별 아닌 이별/이상우 - 하룻밤의 꿈/이승환 -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이승환 -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오공감 - 한 사람을 위한 마음/피노키오(김성면) - 사랑과 우정사이/홍성민 - 기억날 그날이 와도 ← 전부 오태호가 만든 노래다.
1집보다 2집이 더 좋은 음반이 몇 가지 있는데 터보 2집, 오태호 2집, 더더 2집이 그런 경우다. 한, 두 곡 때문에 좋다는 게 아니라 수록된 모든 곡에서 엄지를 치켜들게 된다.
더더 2집도, 오태호 2집도, 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거다. 이사 다니면서 없어지... 지는 않았을 거다. 지금은 의절하고 남으로 지내는 엄마 집에 남아있을 게다, 버리지 않았다면.
예전에는 4,500원 정도 했더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5,500원인가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10,000원을 훌~ 쩍 넘어간다. 18,000원인가 준 것 같다.
이제부터는 워크맨 사진. 이발기用 기름을 가지고 와서 녹슨 부분에 조금씩 뿌리고 면봉으로 닦아주었는데... 먹통이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 돌아갔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 년...
검색해보니 내부에 고무로 된 벨트 같은 것도 들어가는 모양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경화된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하더라. 보조밥통에 새 건전지를 넣었는데 감감무소식인 걸 보니 모터 자체가 안 돌아가는 모양. 어디가 문제인지 뜯어서 고쳐봤음 싶은데 똥손이니 괜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다행히도 국내에서 수리를 해주는 분들이 계신다. 세운상가 쪽에도 있는 것 같고. 전화로 문의를 해볼까 했는데 토요일 저녁이니 실례가 될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룬다. 하필 다음 주는 추석이니 명절 지나고 연락해봐야 할 것 같다.
일본 여행이 가능하다면 덴덴타운 가서 수리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틀림없이 새 제품 수준의 중고들도 잔뜩 팔리고 있을테고. EX-5나 EX-7이라도 건지게 되면 대박이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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