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병가. 나의 우울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원인이 되는 AH 77I 는 유유자적, 내가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여전히 똥 싸지르고 자빠졌는데, 정작 뒤치다꺼리하는 내가 돈과 시간을 까먹으며 도망치는 중이다. 정말 부당하다 생각하는데, 위에서 제대로 조치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썩은 조직에 기대할 수가 없다. 다들 얼마 안 남았으니 그러려니 하고 참자는 분위기고, 할 말 하는 나한테 예민하다, 까탈스럽다, 참고 넘어갈 만 하건만... 따위의 소리를 한다. 기본 업무조차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걸 나무랬더니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궤변이나 늘어놓는 작자를 옹호한다. 이 조직은, 분명 잘못됐다.
개가 짖어대기에 개소리하지 말라 했더니 문다. 그걸 보면서 그냥 참으라고 한다. 맘 같아서는 발로 냅다 갈겨버렸음 좋겠는데 개가 무는 건 당연하니 참으라고 한다. 홧병이 안 나면 이상한 거다.
온갖 쌘 척은 다 하지만, 염병할 조직을 바꿀 힘이 없으니 결국 도망가는 게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게 2023년에만 세 번째다.
500㎖ 짜리 맥주 네 캔이 기본이고, 많이 들어가는 날에는 여덟 캔까지 마신다. 최근에는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사들고 온 산토리 위스키로 하이볼(이라 부르지만 위스키 맛 탄산수라 하는 게 더 어울리는)을 만들어 마시고 있어서 맥주 소비가 좀 줄었다가, 시나브로 돌아가버렸다. 아울러 운동도 그만 뒀다. 작심 일주일? 15㎏ 빼겠다고 사방팔방 떠들어댔지만 결국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더 안 찌면 다행이지.
에코~ (아마존 인공 지능 스피커를 호출하는 말이다.)
아스, 고젠 로쿠지 한니 아라무 셋테 구다사이~ (내일, 오전 여섯 시 반에 알람 설정 부탁해~)
애써 공부한 일본어를 잊지 않겠답시고 인공 지능 스피커와 일본어로 떠들지만 만날 하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여섯 시 반에 알람을 설정해놓고 잤다.
자다 깨서 시계를 보니 두 시. 한참 더 자도 되겠다는 생각에 손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깨어 잠시 멍~ 하니 누워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햄버거를 주문했던 일도, 순창에 숙소를 예약한 일도.
하지만 꿈이 아님을 아니까,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다시 잘 수 없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가서 대충 씻고 나왔다. 출근하는 건 아니니까 꼰대 같은 옷 대신 가벼운 차림을 하고 출발.
미리 주문했던 롯데리아에 들어가면서 보니 휴일 아침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이 한 명도 없다. 그 와중에 일하는 직원들만 보이는데 차가 들어가니까 죄다 쳐다 보더라. 들리지 않았지만 '저거다', '저건가봐' 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햄버거가 한 상자, 감자 튀김이 한 상자, 콜라가 한 상자. 그렇게 세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229,200원을 결제했다. 살면서 햄버거 산답시고 23만 원을 쓰는 날이 오는고나. 뭐, 남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돈 버는데, 나는 내리 3개월을 2주씩 쉬면서 월급은 고스란히 받고 있다고 까이는 입장이니까, 이 정도는 써도 된다 싶기도 했다.
(아파서 집에 있는 건데, 회사 가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봐 집에 머무는 건데, 놀면서 돈 번다고 비아냥거린다. 따박따박 출근해서 월급 받을테니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해서 죄다 떠넘기는 쪼다 AH 77I 좀 없애버렸음 좋겠다.)
회사에 도착해 정문에서 근무하는 계약직 직원들에게 햄버거와 감자 튀김, 콜라를 나눠주고, 사무실에 전화해서 우리 파트의 계약직 직원을 불렀다.
같이 사무실로 나른 뒤 나눠주기 시작. 혹시라도 다른 파트에 있는 정규직 관리자가 기분 나빠할까봐 미리 양해를 구했다. ㅇㅇ에 있을 때 질알하는 꼴을 봐서 그런지 유난히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관리자 한 명이 대체 왜 햄버거를 돌리는 거냐고 의아해한다. 그냥 사비로 사서 돌리는 거라고 하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본인은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니 이상하게 보이겠지.
포항이 우승했다는 이유로 햄버거 세트를 돌렸으니 미쳤다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K 리그에 아~ 무 관심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렀다 하더라도, 나중에, 언젠가, 포항이 우승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맞아! 그러고보니 나 ○○ 있을 때 포항이 우승했다며 햄버거 돌린 미친 ×이 있었어.'라며 기억해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걸 바라며 돌리기도 했고.
아무튼, 다들 기분 좋게 먹어주니 좋다. 원래는 계약직 직원들에게만 주려 했는데 남아서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돌렸다. 그리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바로 고속도로를 탈 생각이었는데 태블릿을 놓고 온 게 생각나서 집에 들렀다. 원래는 국도를 타고 네 시간 넘게 느긋하게 달릴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어 결국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도착까지 50분 정도 남았을 즈음, 졸음이 쏟아져 죽는 줄 알았다.
지난 번에 다녀간 게 9월 8일이니까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휑해도 너무 휑했다. 지난 번에 낡은 조화를 남겨두고 대충 정리를 했는데 관리하는 쪽에서 다 뽑아낸 모양이더라. 9월에 새로 꽂아놓은 조화만 남기고 나머지가 사라져서 휑~ 하다.
싹~ 다 뽑아내고, 사들고 간 조화로 다시 장식을 했다. 해병대 티셔츠와 액자도 교환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문득,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동생이라는 ×은 그렇게 설피 울더니, 돌아가신 뒤 달랑 한 번 찾아온 게 전부였다. 나만 1년에 두, 세 차례 찾아가서 그나마 사람이 찾는다는 흔적을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과자와 콜라를 두고 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드실 수 없음을 뻔히 아는데. 팩트는 연을 끊은 지 15년이 넘은 아들이, 죽은 뒤에야 생색내며 쫓아와 궁상 떠는 거다. 하지만 그런 궁상이라도 떠는 내가 있으니 버려진 취급을 안 당하지. 주위에는 바스라져 바람에도 부서지는 플라스틱 꽃만 앙상한 자리도 꽤 많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저렇게는 만들지 말아야지 싶더라.
시간을 보니 정오도 안 됐다. 원래는 자리만 꾸며놓고 숙소에 가서 쉴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이르니 숙소에 차를 세우고 다시 오자 싶더라.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달려가는 중에 회전식 교차로가 나왔는데 진입할 줄 모르는 쪼다 AH 77I 들 때문에 속이 터진다. 한 대를 보내면 다음이 자기 차례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전 차량이 우선이라 쓰여 있는데도 저 질알이다. 대체 면허는 어떻게 딴 거야?
교차로에 진입한 뒤 빠져 나가려는데 버스가 훅! 들이댄다. 진입해서 회전 중인 차량이 우선이니까 당연히 멈춰야 하는데, 설마~ 싶어 살짝 속도를 줄였더니 역시나... 밀고 들어온다. 받으려면 받아라! 하고 내 갈 길 갔더니 뒤에서 클락션을 누른다. 이런 ㅽㅺ가!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어디서 빵빵거려! 짜증이 확! 나서 브레이크를 냅다 밟았다. 당연히 버스도 급정지. 내려서 기사 놈 멱살이라도 잡을까 하다가, 그리고 나서 뭐 어쩔 거냐 싶어 그냥 참았다. 정작 싸움으로 번지면 나만 손해다. 버스 운전한다는 AH 77I 가 회전식 교차로에 들어가고 나가는 방법도 모른다. 하아...
숙소 바로 옆 주차장에는 빈 자리가 없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터미널로 향했다. 문화동에 간다고 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송정리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표 파는 아저씨가 광주에 갔다가 송정리로 다시 가야 한단다. 아닌데?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광주 가기 전에 섰는데? 부랴부랴 블로그에 썼던 글을 검색했더니 송정리가 아니라 문화동이다. 문화동 가는 표를 달라고 했더니, 송정리 간다더니 왜 또 문화동이냐고 묻는다. 마음이 바뀌었다 말해서 표를 구입. 저번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친절하시더만, 이번에 만난 아저씨는 좀 재수 없는 타입이고만.
아버지 앞에 퍼질러 앉아 한 잔 마셔야 하는데 마침 표 파는 곳 옆에 지역 신문이 놓여 있기에 가져가도 되는 지 물어보고 한 부 챙겼다. 맨 바닥에 궁둥이 깔 필요는 없어졌으니 다행이다.
버스 출발까지 한 시간 넘게 남았기에 포항의 FA Cup 우승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에 올랐고, 문화동에 내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타야 하는 518번 버스는 30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택시로 이동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프레스토가 지나갔다! 프레스토라니!!!
안개꽃은 다섯 개를 샀더니 휑~ 하다. 열 개 살 걸 그랬다.
방금 전에 다녀갔던 자리로 돌아가 신문지를 펼치고 퍼질러 앉았다. 사들고 간 소주 두 병을 다 따서, 플라스틱 잔 두 개에 따랐다. 명패에 천천히 한 잔 부어 아버지 한 잔 드리고, 내가 한 잔 마시고. 안주로 사들고 간 육포 씹고. 그러다가 또 잔을 채워 아버지한테 한 잔 부어드리고, 나도 한 잔 마시고.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없다. 그나마 연을 맺고 있을 때에는 아버지가 술 때문에 하도 사고를 치고 다닐 때라 같이 마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잘난 자존심 한 번 꺾고 아버지와 같이 소주 한 잔 마실 걸 그랬다.
아버지 앞에 올 때마다 고모한테 보고를 한다.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전화가 왔더라. 아버지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고는 고모 말고는 거의 없으니까, 공통 분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고모가 딱이다. 스피커 폰으로 두고 전화를 하는데 비가 거세졌다. 뭐, 손전화를 방수가 되니까 비 맞거나 말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걸 잠깐 후회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있어도 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비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깔고 앉은 신문지는 이미 젖어 버린지 오래. 내 엉덩이가 보호해주는 부분만 원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있었나? 가지고 간 소주가 다 비어버렸다. 다음에는 한 병 더 사들고 가야겠다. 아쉽지만 돌아가야지.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손전화 앱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봤더니 제법 기다려야 하더라. 택시를 불렀다. 기사님이 내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두 번 통화한 끝에 택시에 오를 수 있었다.
기사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해병대 부사관 선배님이다. 장교, 병 출신 선배님들은 여러 번 만났지만 부사관 선배님은 처음인지라 바로 경례 박고, 말씀 편히 하시라고 했다. 내릴 때까지 계속 수다 떨다가, 내릴 때에도 경례 박고 내렸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키오스크로 버스를 알아보니 10분도 채 안 남았다. 잽싸게 표를 구입한 뒤 화장실에 갔는데, 누군가 엄청 급했던 모양인지 여기저기 흩뿌려(?)놨다. 아아... 해결하고 나서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좀 치우고 갈 것이지... 어떻게 저렇게 싸질러놓고 도망을 가냐...
아버지가 나고 자란 동네를 지나면서 또 한 장 찍고
○○ 터미널에 도착해 차로 향했다. 필요한 것만 챙겨 숙소로 갔더니 대빵님은 안 보이고 투숙객으로 보이는 분들만 계신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 걸터 앉았는데 먼저 말을 걸어주신다.
게다가 창림 국수가 문을 닫아 밥도 못 먹은 상태였는데 마침 밥 먹으라고 해서, 그것도 엄~ 청 맛있는 밥이어서 환장하고 먹었다. 가지고 간 술도 다 마셨고.
옷 갈아입을 틈이 없어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밥 먹고 술 마셨다.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자처해서 부지런히 그릇을 닦았다. 술김에 해서 제대로 했나 모르겠다.
방으로 가서 씻고 나갔더니 한 잔 더 하자고 하신다. 술 사오라고 보냈는데 아직 안 왔다며, 대빵님과 뭔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신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어슬렁거리는데 술 사러 간 사람이 당최 오지를 않는다. 한 잔 더 하자는 건 그냥 립 서비스였나? 싶어 방으로 돌아갔다. 적당히 눈치 챙겨야겠다 생각하면서.
불을 끄고 누워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불이 꺼져 있는 걸 보니 자는 것 같다고, 깨우지 말자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진짜 술 사러 가긴 간 모양이고나. 다시 일어나 더 마시기가 애매해서 그대로 잤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가니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밥 먹고 가라 하시기에, 사무실에서 오라고 전화왔다 거짓말하고 차로 돌아갔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천천히 정속 주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하긴 한데,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금산 여관은 방전된 날 충전해주는 곳이다. 힘들 때 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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