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땅을 밟은 지 4, 5, 6, 7, 8,... 5일째 되는 날. 이 날도 역시나 할 일이 없다. 고비 사막을 포함한 풀 코스 여행을 하려면 최소 7박 8일은 필요하다고 해서, 4일에 도착하여 그 날은 숙소에서 쉬고, 5일부터 여행을 떠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정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야 했다. 그 결과 테를지 국립 공원에 다녀오는 당일치기 여행을 하루 하고, 3박 4일의 미니 고비 코스를 선택. 남는 시간은 울란바토르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차도 없었고, 설사 렌트가 가능한 환경이었다 해도 엄청난 교통 체증과 운전 문화를 이겨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과도한 난방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내가 남들보다 열이 많아서 더위를 잘 타긴 하는데, 함께 여행을 다녀왔던 일본인 쇼 氏도 똑같이 말했으니 UB Guesthouse는 당장이라도 선풍기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7일 저녁부터는 난방이 좀 약해져서(안 하지는 않았다.) 살 것 같다 싶었지만, 저녁을 먹고 오자마자 누운 탓인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명치 께가 답답했다. 속은 더부룩하고 답답하지, 방은 덥지, 빤쓰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것조차 힘든 밤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깨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다섯 시에 눈을 떴다.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데 바지를 입는 게 마냥 귀찬다. 그래서 그냥 빤쓰 바람으로 나갔다. 양키들은 처자들도 브라에 빤쓰만 입고 잘 돌아다니던데 동양의 이슬람, 유교에 쩌든 아저씨라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기에 래쉬 가드를 걸쳤다. 면세점에서 산 건데 진짜 잘 샀다고 생각하며 입고 다녔다.
《 인터넷에서 5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으로 팔고 있는데 면세점에서 3만 원 안 주고 샀다 》
화장실에 다녀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여행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반납할 때가 되어 결말을 알지 못한 채 돌려준 책이 있는데 그걸 전자 책으로 질렀더랬다. 한적한 카페에 가서 그 책이라도 볼까 하다가, 나라면 한 시간은 고사하고 30분 앉아 있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며 일어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어디가 되었든, 일단 나가자 싶어 대충 씻고 방을 나섰다. 사무실에 바비가 있기에 다시 한 번 얼마 내야 하냐고, 알려줘야 거기에 맞춰 돈을 찾는다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설명을 했더니 일본인 동행이 아직 오지 않아서 모른다면서, 오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ATM은 24시간 이용할 수 있으니까 여행을 다녀와서 내라고 한다.
《 출발 하루 전까지 일본인 한 명과 나 말고는 투어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 》
아... 바비가 내 일정을 까맣게 잊어버렸고만? 하긴, 수십 개의 팀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럴 만 하다.
다시 설명을 했다. 12일이 여행을 마치는 날인데 나는 공항으로 간다, 그래서 여기에 들리지 않는다, 그랬더니 일단 오늘은 80만 투그릭을 찾으라고 한다. 그게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란다. 내일 떠나는 투어 비용만 132만 투그릭(390 달러)이니까 내일 찾으려 했다면 돈이 부족했을 거다. 물어보기를 잘 했다.
숙소 근처에 은행도 있고 ATM도 있지만 일부러 국영 백화점까지 걸어갔다. 백화점 1층에 있는 은행에 ATM 기기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이용 중이기에 남은 하나에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 했는데 안 닫히게 돌을 괴어 놨더라.
주 거래 은행이 국민인데 일본에서 유학할 때 신용카드 두 장으로는 인출이 안 되더라. 그래서 은련(유니온 페이) 결제가 가능한 체크 카드를 추가로 만들고 계좌 인출이 가능하도록 설정했는데 그 카드로 인출이 되더라고. 그래서 다른 카드는 건너뛰고 바로 은련 카드로 인출을 시도했다. 아무 문제없이 잘 된다. 환전할 때 만 투그릭 짜리 지폐를 잔뜩 주기에 그게 가장 큰 돈인 줄 알았는데 2만 투그릭 지폐가 있더라. 아무튼, 출발 전에 검색을 해보면 죄다 여행용 카드라면서 트래블 어쩌고 하는 걸 챙겨서 썼다고 하기에 조금 걱정을 했는데 일본에서 잘 썼던 체크 카드로도 몽골에서 현금 인출이 가능했다. 인출하자마자 문자도 오더라.
남은 돈이 20만 투그릭이고, 80만 투그릭을 찾았으니 100만 투그릭. 달러도 조금 가지고 있으니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행하면서 얼마를 썼는지 꼼꼼히 기록해뒀다가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마음 먹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흐지부지 되고 만다. 항상 그렇다.
허기가 져서 뭐라도 뱃 속에 넣어야 했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 대충 검색해보다가 일단 커피라도 마시자 싶어 숙소 근처의 깔끔한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가 없어서 롱고를 주문.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아이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근처에 있는 식당을 대충 알아보다가, 일본 식당이 있기에 가보기로 했다. 한국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밥이 그리웠다.
식당에 들어가니 이랏샤이마세~ 하고 인사를 한다. ㅋㅋㅋ 몽골까지 가서 일본 음식점을 찾는 한국 사람이라니.
1인 테이블에 앉았는데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기에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몽골 사람 같은데 혹시나 싶어 일본어로 메뉴가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일본어로 대답한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카레 돈카츠와 우동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는데 카레 돈카츠는 일본에서 종종 먹었던 코코이치방야의 그 맛이라 반가웠다. 하지만 우동은... 맹탕이었다. 너무 맛이 없더라.
밥을 먹고 나서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할 게 없어서, 공연장에 가볼까 하다가 가는 길에 나와서 들린 거였다. 그런데 한 쪽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쪽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라. 죄다 레드 크로스라 적힌 조끼 같은 걸 입고 있었고.
몽골 적십자에서 무슨 행사라도 하는 걸까? 초대 가수인지, 여러 명이 나와서 노래를 하고 무대 앞에 잔뜩 몰린 학생들이 따라 부르면서 춤 추고 그러더라. 그나저나, 몽골 학생들은 교복을 참 짧게 입는다. 일본은 중학생은 길~ 게,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똥꼬 치마로 진화(?)하는데, 몽골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죄다 똥꼬 치마다.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고개를 돌리면 죄다 그러니... 해외 나가 추태 부리는 개저씨 소리 들을까봐 보일 때마다 고개 돌리느라 힘들었다.
두 시간 가까이를 그렇게 노래하고 춤추는 거 보면서 멍 때리고 있다가, 슬슬 공연장 쪽으로 가볼까 싶어 이동했다.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표 파는 곳의 창문은 닫혀 있고 안에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은 통화하느라 바쁘다. 밖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매표소 입구에 설치된 모니터에 홈페이지 주소가 있기에 손전화로 접속해봤다.
공연 안내를 하고 있는데 17시가 아니라 18시다. 게다가 18시에 시작하는 공연이 두 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꼭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아닌지라 포기하고 그냥 밖으로 나갔다.
저녁에 자다가 목이 마를 때 마실 생각으로 물을 하나 사고, 이틀 연속으로 갔던 숙소 근처의 펍에 또 갔다. 칼텐버그 병 맥주부터 주문하고 메뉴를 보다가 배가 고프지 않아 감자 튀김을 달라고 했다.
《 며칠 전에 마신 건 괜찮았는데 이 날은 별로여서 두 병째는 고비 맥주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또 칼텐버그를... 》
《 간이 아예 안 되어 있어서 별로 맛이 없었다 》
취할 때까지 마실 생각은 아니었던지라 적당히 마시고 숙소로 돌아갔다. 18시 밖에 안 되어 아직 환하다. 언제 부를지 몰라서 바지만 입고 있다가, 더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빤쓰만 입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슬슬 자야겠다 싶어 자려고 하려는데 그 순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 같이 여행을 떠날 일본인이 왔다며, 사무실로 와달라고 한다.
사무실에 가니 인상 좋은, 누가 봐도 일본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다. 간단히 인사하고 통성명을 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영어를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라고 하기에 나도 영어가 형편 없다고 했다. 일본어를 거의 다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잘한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서비스 멘트겠지. 실제로 유학할 때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수준이 되고 말았으니까.
오사카에서 공부했다니까 자기도 오사카에 산단다. 뭐, 오사카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텐노지에서 공부했다니까 텐노지에 산단다. 응? 그 넓은 오사카에서, 같은 곳에 살았었다고? 세상 참~
수다 떨다가 5월의 몽골은 춥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엄청 덥다고 했는데 그 때 간사이 사투리를 썼다. 그랬더니 빵~ 터져가지고... ㅋㅋㅋ
내야 할 돈을 정산하면서 바비가 놀란다. 비싸다고. ㅋ 뭐, 생각없이 지내긴 했다.
공항에서 데려 오고, 데려다 주는 비용이 80달러($40×2). 하루 숙박비가 30달러인데 닷새 묵었으니까 150달러. 테를지 투어 비용이 50달러. 빨래 두 바구니 했으니 6달러($3×2). 3박 4일의 미니 고비 투어가 390달러. 그 외 이것저것 해서 676달러인데 6달러 떼고 670달러를 내야 했다.
오전에 인출한 80만 투그릭에 남은 10만 투그릭을 얹어 90만 투그릭을 건네니 405달러가 남는다. 가지고 있는 게 402달러였기에 400달러를 건네고, 나머지 5달러는 투그릭으로 계산하겠다고 하니까 바비가 됐다면서 또 까줬다. ㅋ 11달러를 할인 받은 셈이다.
달러를 쓰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 들긴 했다. 그냥 아껴둘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 달러를 쓰는 나라로 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알 수 없고, 가지고 있어봐야 좋을 게 없겠다 싶어 그냥 썼다.
비행기 놓쳐서 17만 원 추가로 까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얼추 200만 원 가까이 까먹게 되는 것 같다. 항공권을 포함해서 100만 원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많이 썼다.
내일 열 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이동하는 시간만 일곱 시간이라서 그 날은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구경을 한다고. 내일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거라 샤워도 되고, 인터넷도 되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게르에서 자게 되니까 샤워도 안 되고 인터넷도 안 된다고 미리 알려준다. 48시간을 보조 배터리로 버텨야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바비가 침낭을 준다고 했는데 개인 침낭이 있다고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그냥 받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7만 투그릭이 남았는데 여행하는 동안 먹을 걸 사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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