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눈이 떠져서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싶어 화장실로 간 뒤 체중 감량에 힘쓰고 나서 양치랑 면도만 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 전에 샤워하는 스타일인데 캄프 호우칸초는 뭔가 샤워가 내키지 않는 구조랄까? 뭐, 귀찮아서 안 해놓고 핑계대는 거지만. ㅋ
오늘은 일행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나는 여행 비용을 아끼려고 평일 출국, 평일 귀국 일정을 잡았지만 일행은 남은 휴가가 넉넉치 못해서 주말을 끼고 왔다 가는 거. 아침 일찍 뜨는 비행기가 아니니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찌감치 공항으로 가는 게 좋다.
일행은 가리는 음식도 없고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에키벤에 도전해보고 싶어했다. 일본어로 역(駅)을 '에키'라 하고, 도시락을 '벤토'라고 한다. 합쳐서 에키 벤토인데 줄여서 에키벤이 된 거다.
예전에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이 식량을 싸들고 다녔다 한다. 3일치를 싸들고 다녔다는데 일찌감치 다 까먹는 놈도 있고, 무겁다고 버리는 놈도 있고, 별에 별 놈이 다 있었다고. 그러다가 전국에 철로가 깔리면서 직접 싸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는데 대신 도착하자마자 전장에 투입할 수 있게 이동 중에 밥을 먹였단다. 그게 에키벤의 시초다.
일본은 편의점 도시락도 종류가 많고 맛이 있지만 에키벤도 못지 않다. 지역 특산물로 만든 도시락이 반드시 있고, 거기에 또 인기 순위를 따져서 가장 잘 팔리는 건 따로 표시를 해둔다. 일찌감치 매진되는 것들도 있고.
2016 간사이 - 첫째 날 : 집에서 오카야마까지 (tistory.com)
2016 요나고 - 요나고 공항 → 오카야마 (tistory.com)
2016년에만 두 번 먹었었네. 먹으면서 궁금했던 건, '남들에게 피해 끼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일본인인데, 열차 안에서 냄새 풍기면서 도시락 먹는 건 괜찮나?' 하는 거였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딱히 생각해본 적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고.
에키벤을 팔고 있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좀 찝찝했다. 그래서 역무원에게 물어봤다. 열차 안에서 에키벤을 먹어도 되냐고. 된다고는 하는데 뭔가 떨떠름한 것 같다. 그래서 실례가 되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닌데 코로나 때문에 가급적이면... 이라고 말 끝을 흐린다. 일행에게 그대로 전하고 안 먹는 게 낫겠다고 했다.
히메지에서 오카야마로 이동했기에 노조미를 타지 못했었는데 이 날은 신 오사카까지 가서 내리는 거니까 노조미를 타도 된다. 노조미는 히카리와 달리 2/3열 구조. 그렇지. 이러니 내가 헷갈리지. 일본에서 열차를 여러 번 탔는데 2/3열 구조인지, 3/2열 구조인지 항상 헷갈렸다. 히카리는 3/2열 구조였는데 말이지.
신 오사카에서 내렸다. 하루카를 타고 간사이 공항으로 가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 하루카를 대체 몇 번이나 타는 건지. 세다가 포기했다. ㅋ
공항에 내려 식당에서 밥을 먹고 티켓을 받았다. 1층에 있는 도토루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난 후 일행과 헤어졌다. 일본어가 가능하니까 알아서 안내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왔는데 제대로 해준 게 없어서 미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설명해줘서 고맙다 하고, 재미있다 하고, 즐거워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 누군가와 같이 여행을 다니면 대부분 불편했기에 혼자 다녔는데 뭘 해도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데다 믿고 맡겨주니 다닐만 했다.
이제는 오롯이 내 시간. 다시 하루카에 올랐다. 이 날은 교토에 게스트하우스만 잡아놓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2019년에 갔던 곳인데 그 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에 이번에 또 가고 싶었다. 교토의 명소는 거의 다 봤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지만 숙소 때문에 가는 거다.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졸음이 쏟아진다. 엄청 피곤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게 되는데 그 수준이었다. 하긴, 일주일 째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피곤할 만 하지.
교토駅에서 내려 이 동네는 빠삭하다는 마음으로 건방을 떨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얼마 안 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3㎞ 가까이 걸어야 했다. 가방이 엄청 무거웠기에 쉽지 않았지만 종종종종 걸어 숙소에 도착.
체크인은 15시부터인데 14시에 도착했기에 짐을 맡겨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신다. 짐만 맡길 생각이었는데 아예 체크인을 해주신다. 교토는 예약할 때 비용을 다 지불했더라도 별도로 200円을 내야 한다. 교토 시에서 책정한 별도의 금액이다. 간단히 소개를 해주시기에 3년 전에 왔었다고 했더니 그러냐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신다.
1층 침대를 쓰고 싶었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2층을 써야 했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정리한 뒤 나갈 준비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이 이르니 근처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토게츠교(橋)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섰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마음이 서지 않는다. 철도 박물관에 가볼까 하다가 갑자기 토게츠교(橋)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라시야마에 가기로 했다.
2015 간사이 - 06 : 토롯코 열차 (tistory.com)
2015 간사이 - 07 : 호즈강 급류 타기 (tistory.com)
2015 간사이 - 08 : 토게츠 교 (tistory.com)
2015년과 마찬가지로 토롯코 열차를 타고 올라간 뒤 호즈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면 어떨까 싶었는데 급류 타기 티켓 판매소의 셔터가 내려가 있다. 배는 탈 수 없는 모양이다. 열차만 탈까 하다가 일단 토게츠교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역만 대충 둘러보고 밖으로 나갔다.
구글 지도에 목적지를 찍고 어슬렁~ 어슬렁~ 걸었다. 자유 여행이 재개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로 바글바글. 한국 사람도 꽤 많았다. 여기저기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진을 찍었다.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보니 토게츠교 근처에서 배를 타는 것도 있는 모양. 말쑥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처자가 배 타는 걸 안내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나온 쪽으로 들어갔다. 유람선을 운영하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 호텔이었다. 호텔에서 묵는 사람들만 배에 태워주는 모양이다. 뻘쭘하게 돌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니 입구에 서 있던 처자가 '뭐지?'하는 눈으로 쳐다 본다. ㅋ
앞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위생과는 담 쌓은 걸로 보이는 가게에서 야끼 소바를 팔고 있기에 하나 달라고 했다. 그냥 포장된 거 줘도 되는데 바로 볶아서 주더라. 조금 기다려야 했다. 뜨~ 끈~ 뜨끈한 야끼 소바를 받아들고 앉아서 먹을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강 근처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기에 그 쪽으로 갔다. 아사히 캔 맥주 하나를 사들고 갔는데 자리 잡고 앉은 후에 봤더니 테이블에 가게에서 뭔가 사지 않은 사람은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쓰여 있더라. 어디를 가나 관광지는... ㅋ
게 눈 감추듯 야끼 소바를 뱃 속으로 때려넣고 맥주를 홀짝이다가 강 쪽으로 가봤다. 뭔가 팔고 있어서 먹을만 하면 사려고 했는데 딱히 내키지 않는다. 강 바라보면서 맥주만 마셨다.
딱히 할 게 없어서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근처는 2015년에 이미 봤던지라 다시 볼 맘이 그닥 들지 않았다.
토롯코 열차
역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할 게 없다. 숙소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모처럼 왔으니까 토롯코 열차 정도는 타자 싶어 표를 구입했다. 어두워지고 나면 일루미네이션을 한다고 하니까 그걸 보고 싶었다.
뻥 뚫린 5호 열차는 이미 매진. 일반 열차로 왕복 티켓을 끊었다. 17시 10분에 출발해서 38분에 도착, 5분 후에 다시 출발한다. 야끼 소바로는 배가 차지 않았기에 뭐라도 먹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음식점은 전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열차와 역 주변 사진을 찍으며 어슬렁거렸다. 잠시 후 시간이 되어 출발. 1호차 13D 자리다. 내 앞에 부부로 추정되는 노년의 남녀가 앉았다. 멍 때리며 밖을 보고 앉아 있었다.
바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내려갈 때에는 자리가 바뀐다.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배려한 거다. 그러니까 그대로 앉아 있지 말고 내려야 한다. 내렸다가 바뀐 내 자리를 찾아 갔다. 이번에는 3호차 12D.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해가 지니 춥다. 아무래도 산 속이다 보니 더 춥게 느껴진다. 손전화로 사진을 찍다 보니 안테나가 죽는다. 전화가 안 터지는 구간이 있더라. 포켓 와이파이도 당연히 죽어서 인터넷도 안 된다. 열차가 다녀서 망정이지, 진짜 첩첩산중이다. 공포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으로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할 것도 없으니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전철 안에서 뭘 먹을지 생각했다. 라면을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 일본에 와서 초밥을 먹지 않았으니까, 이 날은 초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밥 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거의 다 내리는 듯 하다. 쌔~ 하다. 이럴 땐 일단 내려야 한다. 어리버리하다가 내려서 확인해보니 교토駅이다. 응? 교토? 41분 도착 예정이었는데? 지금 39분인데? 예정보다 늦는 건 봤지만... 일찍 도착한다고?
역 하나를 더 와버렸으니 반대쪽으로 가야 한다. 마침 반대편에 열차가 서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냉큼 올라탔다. ……… 모든 역에 멈추지 않는 열차였다. 결국 니조駅에서 내려야 했다. 모든 역에 다 서는 열차가 53분에 왔는데 미어 터진다. 도저히 못 타겠더라. 하나를 그냥 보내고 57분에 온 열차를 탔다. 피곤하다.
우메코지쿄토니시駅에 도착해서 꽤 먼 거리를 걸어 쿠라즈시에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젊은 처자 한 명이 들어가기에 하는 걸 대충 봤다. 입구의 키오스크로 몇 명인지 고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테이블과 바 형태의 좌석을 선택하고. 표가 나오면 거기에 좌석 번호가 찍혀 있다. 그 자리로 가서 앉으면 된다. 나중에 계산할 때 필요하니 잘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국어를 지원하니 어려움이 없다. 다만... 레일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코로나 때문인지 접시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반원 모양의 뚜껑이 씌워져 있었는데 그걸 열고 안에 있는 접시를 꺼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결국 케이스까지 같이 내려버렸다. 두 개가 붙어 있더라. 내려서 초밥을 먹고 있자니 지나가는 알바 처자가 당황하며 수거해갔다. ㅋ
어지간한 건 태블릿으로 주문해서 먹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숙소에 가서 한 잔 할 예정이었기에 너무 배 부르면 안 되겠다 싶어 열 접시만 먹었다. 계산하기 버튼을 누르니 남자 알바가 와서 뭔가 슥슥 한다. 카운터로 가면 된단다.
카운터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직원이 와서 계산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종이에 있는 QR을 읽어들이면 자동으로 계산이 되는 거다. 현금과 신용 카드로 결제할 수 있고. 예전의 일본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은근히 자동화가 많이 진행되었다.
편의점에 들러 안주로 먹을 오징어와 얼음 컵을 샀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교토의 대학에 가 공부를 하려 한다는 중국인 젊은이가 있었고, 일본에서 오래 살아 일본어가 굉장히 능숙한 중국인이 있었다. 다른 중국인 처자도 한 명 더 있었는데 일본어가 안 되서 그런지 잠깐 앉아 있다가 금방 자리를 떴다. 한국인 한 명, 중국인 두 명, 일본인 한 명(게스트하우스의 마마)이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아시아의 밤이란다. ㅋㅋㅋ
수다 떨다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23시가 되어버렸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적당히 해야지. 방으로 올라갔다.
▶◀ 이태원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몸과 마음을 다친 분들의 쾌유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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