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
롯데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삼각대 겸 셀카봉을 발견, 지르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놨다. 세 시간 전에 주문하면 받을 수 있는 제품에 해당되는 녀석이라 느긋하게 지를 생각이었는데, 막상 돈 쓰려고 하니 항공편을 조회할 수 없다며 전화하라고 뜬다. 퇴근하지 않고 스물네 시간 일하는 건가? 전화해서 몇 시 비행기로 어디에 가는데 조회가 안 되서 전화했다며 미주알 고주알 떠드는 게 내키지 않아 그냥 포기했다. (앙코르 와트 뒤로 떠오르는 해를 보겠답시고 새벽부터 설친 날에 조금 후회했더랬다. 😩)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도서관으로 갈 예정이었다. 빌린 책을 반납해야 했다. 다녀와서는 냉장고에서 유통 기한이 지난 두부를 꺼내어 김치랑 같이 먹은 뒤 일찌감치 자려 했고. 도서관에 다녀와서 배 채우는 것까지는 계획대로 진행했는데 잠자는 건 실패하고 말았다. 짐을 꾸린 뒤 자야 하는데 귀찮아서 빈둥거리다보니 20시가 넘어가버렸더라고. 부랴부랴 짐을 꾸리고 나서도 한동안 눕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공항 셔틀 타러 집 → ○○○ 터미널
자다 깨서 시계를 봤더니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고작 한 시간 자고 깬 거다. 더 자야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감았고, 얼마 후 눈이 떠져 시계를 보니 알람 울리기 10분 전이었다. 대충 씻고 꺼내놓은 옷을 입은 뒤 출발!
추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로 안 추웠다. 앱으로 택시를 불러 올라탄 게 세 시 14분. 22시 무렵에도 23분 밖에 안 걸린다 하니 20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것 같다.
기사가 내 또래인지 '너만을 느끼며'에 이어 '파일럿', '너에게 원한 건'이 흘러 나왔다. ㅋㅋㅋ
라디오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노래를 들으며 소싯적에 잘 나가던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기사가 갑자기 "역이 아니라 터미널이죠?" 하고 물어본다. 응? 뭐하는 수작이지? 새벽 세 시에 역에 가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잖아? 더 멀리 돌아서 가려고 밑밥 까는 건가? 실시간으로 지도에서 위치 조회가 되는 세상인데도 저런다고? 똑바로 가는지 째려보고 있어야 했나?
동남아 여행을 앞두고 걱정이 됐던 것 중 하나가 바가지였다. 외국인에게만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른다는, 동남아 특유의 바가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그 따위로 관광객을 상대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아니, 지금도 유명 관광지는 자국민에게까지 바가지 씌우고 있으니, 뭐.
예상 금액이 17,000원이었는데 딱 그렇게 나와서 딱히 돌아간 것 같지도 않기에 그냥 내렸다. 터미널 건물로 들어가니 벤치에 노숙자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쪼그려 자고 있더라. 아무리 봐도 버스를 기다리는 분들은 아닌 것 같고. 더 좋은 세상 만들겠답시고 꾸역꾸역 빨간 애들한테 표 줬을텐데,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진 건가? 원래 바닥에서 상자 깔고 자다가 터미널 한 쪽 구석의 플라스틱 의자에서 잘 수 있게 되어 행복해진 걸까? 뭐, 파란 애들 찍는다고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겠지만서도.
화장실에 가서 나오지도 않는 걸 쥐어짜다시피 내보낸 뒤 버스로 향했다. 내 자리를 찾아 가 벨트부터 매려고 보니 3점식! 버스 안전 벨트가 3점식이라니!!! 느리긴 하지만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고만. ㅋㅋㅋ
○○○ 터미널 → 인천 공항
여섯 시 5분에 여주 휴게소에 도착했다. 기온을 보니 영하 4도. ㄷㄷㄷ 10분 정도 쉬고 다시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일곱 시 40분. 안으로 들어가니 C 카운터가 보이는데 스카이 앙코르는 M 카운터. 한~ 참을 걸어야 했다. 인천 공항이 크다는 말만 들었지 체감은 못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오질라게 크네.
학학거리며 도착했는데 휑~ 하다. 여덟 시 40분에 오픈이라기에 그럼 국제 운전 면허증부터 만들어야겠다 싶어 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응, 아홉 시부터. 》
아닌데~ 예전에는 여덟 시부터였는데~ 아이슬란드 갈 때에는 분명히 여덟 시에 만들었는데? ……… 아니었다. 2019년에 아이슬란드에서 운전한답시고 국제 운전 면허증 만들 때에도 아홉 시부터였다. 사람의 기억력... 이라기보다, 내 기억력이라는 게 이렇게 형편없다. |
입구에서 신청서 쓰고, 증명 사진 한 장, 한국 운전 면허증과 같이 내면 됩니다. 2023년 03월 기준으로 8,500원 내야 하는데 신용 카드로만 지불이 가능합니다. |
비행기 표부터 받고 나서 국제 운전 면허증을 만들던가 말던가 해야겠다 싶어 다시 돌아가다가 약국이 보여 모기 기피제 있냐니까 20,000원 짜리를 꺼내서 보여준다. 생각보다 비싸다. 압축 가스로 뿜어내는 방식 같아 보여서 비행기에 가지고 탈 수 있냐니까 위탁도 되고 기내도 된단다. 나보다 더 배웠을 게 분명한 흰 가운의 할아버지를 감히 의심하며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옆에서 아줌마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무슨 무슨 안약 있냐고 물어본다. 약사 할아버지가 꺼내서 보여주면서 8,000원이라고 하니까 '일반 약국에서는 5,000원인데 3,000원이나 더 받으세요?'라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몸 쪽으로 돌직구를 던져 버리네. 할아버지가 당황하며 올랐다고 얼버무린다. 아무튼. 공항 약국 바가지가 보통이 아니다. 어지간하면 동네 약국을 이용하시라.
……… 라고 썼는데, 방금 인터넷으로 가격을 검색해봤더니 모기 기피제의 가격이 20,000원이다. 응? 뭐야? 안 비싼데? 저게 정가인 모양인데? 😦 그나저나,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제품 제공 받아 후기 썼다는 글도 있더라. 아니, 이런 제품은 대체 어떻게 조공 받는 거임? 대체 얼마나 유명해져야 되는 거임? 뭐, 아무튼. '모기는 후추를 싫어한다'라는 제품인데, 뿌리기도 편하고 효과도 확실했다. 이 녀석 덕분에 한 방도 안 물렸다. 곁에서 알짱거리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는 모기를 보며 쾌감을 느꼈더랬다. ㅋㅋㅋ (일단 공항 약국은 비싸다는 건 내 편견인 걸로.)
시간도 때울 겸 밥을 먹으러 갔다. 밖에서 메뉴를 보고 콩나물 해장국으로 정한 상태에서 입장했는데, 자리 잡고 앉은 뒤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마지 못해 순두부 찌개로 급 변경.
아... 와... 어어... 맛이... 세상 짜다! 😧 육수 대신 인천에서 서해 바다 물 퍼다 담은 뒤 고추기름 때려 부으면 이 맛이 날 것 같다. 만드는 사람의 미각이 마비된 것인지 의심했다.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음식이라면 인정하겠다. 한 번 떠먹고 공기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약간의 조개와 새우 한 마리가 들어 있었고, 게(라고 추정되는 녀석)도 반 마리 들어있긴 한데 이렇게 가녀린 녀석을 잡아도 되나 싶을 정도의, 미취학 아동 같은 게였다. 와... 이런 여리디 여린 녀석을 끓는 물에 넣어 식용으로 만드는 데 아무런 저항감이 없다고? 물론 본전 생각에 와그작 와그작 씹고 나오긴 했지만, 해양 생물의 복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밥 먹고 나니 여덟 시 20분.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20분이나 일찍 갔는데, 이미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직원들이 엄청 많았는데 가만히 보니 이제 막 들어온 신입 사원들이 일을 배우고 있는 것 같더라. 먹고 살기 쉽지 않지요잉? 😑 졸려 보이는 사람도 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지런히 적어대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일이 익숙해지면 다들 투덜거리면서 일하겠지. 사람이 다 그러하니까.
수속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아홉 시 20분. 혹시나 짐 검사에서 뭐라도 걸릴까봐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국제 운전 면허증을 만들러 갔다. 캄보디아에서 운전할 계획은 전~ 혀~ 없었지만 국내에서 혹시라도 면허증 내놓으라 하면 그 때 써먹으려고 만들어두는 거.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금방 끝났다. 보안 검색을 받으러 가는데 뒤에 있던 처자가 새치기를 한 모양이다. 그걸 본 다른 처자가 '너, 내 뒤에 있었는데 왜 거기 가 있냐!'고 따진다. 새치기를 한 처자가 나몰랑을 시전하기에 '야, 이 개념없는 ㄴ아, 너 왜 새치기했냐고 따지잖아!'라고 한 마디 보태고 싶었지만, 소심한데다 영어 울렁증이 심한 아저씨인지라,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국적은 알 수 없지만 새치기 한 ㄴ도, 따진 처자도, 둘 다 중국어가 모국어인 것처럼 보였는데, 부당함을 보고 못 본 척 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하며 지적하는 게 정말 멋져 보였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점점 비겁함과 타협하는 내가 혐오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출국 심사 받겠다고 줄 서서 별 생각을 다 한다.
하필 탑승구도 탑승동 맨~ 끄트머리인 132번. 그런데 가는 길이 어째 익숙하다. 예~ 전에 도쿄 갈 때 이 변방까지 갔던 기억이 났다. ㅋ
바로 옆의 131번 게이트 앞에서 제주항공 유니폼을 입은 처자가 탑승 마감한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른다. 그대로 두면 피 토하고 득음하겠더라. 문 닫고 출발한다는 최후 통첩 이후에 뛰어오는 사람들도 있더라. 그런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한, 두 명이 아니다. 내 기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중에 보니 남자 애들 두 명은 비행기 놓쳤더라. 허...)
인천 공항 → 프놈펜 공항
3열 좌석인데 가운데가 비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카이 앙코르의 비행기는 A320 기종이고, 비지니스 좌석이 이코노미 좌석과 구분되지 않는, 평범하고 평범하며 평범한 비행기였다. 이륙 시간은 열한 시 15분이지만 활주로에 들어선 뒤 엉덩이까지 들어올린 시각은 열한 시 40분이었다. 멍~ 하니 창 밖을 보고 있자니 입국 서류를 나눠주더라. 파란 종이를 먼저 주고, 이어서 노란 종이를 주면서 뭐라 뭐라 하는데 당최 안 들린다. "파든?" 하니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 "응?" 하니까 한숨을 쉬더니 종이를 주고 간다. 아니, 영어를 못 알아듣고 어쩌고도 아니고, 아예 안 들린다니까! 게다가, 나중에 안 거지만, 노란 건 입국 서류더만! 그럼 외국인은 당연히 써야 하는 거 아니냐? 설마, 나 캄보디아 현지인 같았어?
《 일부러 가이드 북에 있는 작성 방법을 사진으로 찍어 갔는데... 》
《 다르잖아!!! 》
헤매지 않으려고 가이드 북에 있는 입국 서류 쓰는 방법을 사진으로 찍어 놨는데, 아~ 예 다른 종이가 주어졌다. 이래서야, 가이드 북을 산 의미가 없잖아!!!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가이드 북의 도움을 거의 못 받았다. 어느 출판사의 어떤 책인지는 굳이 까발리지 않겠다. 그저 가면 된다고 바람 넣는 나쁜 AH 77I 들.)
《 익숙하지 않은 크메르 문자. 》
《 줄 서서 뜨는 게 당연한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
《 드디어 이륙! 오랜만이라 살짝 쫄아서 똥꼬에 힘주고 있었다. 》
《 아파트가 지긋지긋했던 곳을 떠나 아파트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곳으로. 》
《 순토 카일라시가 표시하는 고도는 믿을 게 못 된다. 아~ 예 안 맞는다. 》
《 언젠가 쓰겠지~ 하고 가방에 챙겨뒀다가 결국 한국까지 그대로 들고 온 물티슈. 》
이륙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났나? 사료를 풀기 시작했다. 시엠립으로 가는 건 밥을 안 주는데 프놈펜으로 가는 건 준다더라고. 뭔가 덜 손해보는 기분이었지만 받아든 음식의 퀄리티는... 음... 아... 오... 예...
치킨이랑 피시가 있다기에 망설이지 않고 치킨을 선택했는데, 밥 맛은... 뭐, 그저 그랬다. 핀에어에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비교 불가다.
밥 먹고 나서 커피 일 잔을 마시고 나니 할 게 없다. 미리 다운로드 받아놓은 영화나 봐야겠다 싶어 보다가, 전자 책 보다가, 자다가, 그렇게 간신히 여섯 시간을 버텨 드디어 프놈펜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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